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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도입↔서론 / 본문↔본론 / 마무리↔결론 / 결단↔결단찬양 / 기도↔기도제목
섹션별 본문 (5개)
서론 — 운동회 이어달리기
1296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 시절 가을 운동회를 기억하십니까.
저에게 운동회의 절정은 언제나 마지막 순서인 이어달리기, 계주였습니다. 개인 달리기에서는 그렇게 조용하던 사람들도, 계주만 시작되면 운동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도 목이 쉬도록 응원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어달리기가 다른 경기와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혼자 뛰는 경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는 먼저 달린 주자가 있고, 그 주자가 손에 쥐고 온 바통이 있습니다. 아무리 발이 빠른 사람도, 앞 주자가 건네주는 바통을 받지 못하면 단 한 걸음도 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잘 달려도, 결국 나는 내게 주어진 한 구간만 달립니다. 내 구간을 다 달리면, 나는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고 트랙에서 내려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거짓 없는 좋은 믿음을,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바통을 '건네주는' 사람의 자리에서 바라본 은혜였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 자리를 조금 옮겨 서 보려고 합니다. 바통을 '받아 든' 사람의 자리, 지금 이 순간 트랙 위에서 자기 구간을 달리고 있는 주자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로부터 믿음의 바통을 받아 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마지막 절부터 12장 2절까지는, 바로 이 이어달리기의 그림을 우리 앞에 펼쳐 보입니다. 11장은 믿음의 사람들, 곧 먼저 달린 주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벨과 에녹과 노아, 아브라함과 사라, 모세와 라합, 이름을 다 부를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자기 구간을 달렸습니다. 그리고 12장에 이르러 본문은 시선을 돌립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12:1). 이제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먼저 달린 이들의 이야기에서, 지금 달리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믿음의 경주에 지쳐 있었습니다. 본문 바로 다음 절인 3절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12:3). 오래 달리다 보니 다리가 무겁고, 숨이 차고, 그만 주저앉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그런 마음이 있을지 모릅니다. 월요일 아침, 다시 무거운 몸을 일으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래 붙든 기도에 아직 응답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신앙이 어느새 습관처럼 밋밋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그 지친 주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이 트랙 위를 달리는 한 사람으로서, 그 세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먼저 달린 이들을 기억합시다
1266자
첫째로, 우리보다 먼저 달린 이들을 기억합시다.
본문 39절과 40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11장에 등장한 믿음의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뜻밖의 말이 이어집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받았지만, 살아생전 그의 손에 쥔 땅은 아내를 묻을 무덤 자리 하나뿐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약속을 바라보며 평생을 달렸지만, 그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한 채 트랙에서 내려갔습니다. 그들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 약속의 실체가 바로, 우리가 이미 알고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4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라고요.
성도 여러분,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잘나서 더 많이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뒷구간을 달리도록, 하나님이 순서를 그렇게 정하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각자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이 믿음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곰곰이 되짚어 보면, 나에게 처음 예수님을 알게 해 준 어머니나 할머니가 떠오를지 모릅니다. 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던 어느 권사님, 주일학교 선생님이 생각날지 모릅니다. 이름도 얼굴도 이제는 잊혀졌지만, 이 신앙의 바통이 오늘 내 손에 오기까지 자기 구간을 묵묵히 달려 준 무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얼굴들을 잠시 떠올려 보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지쳤다고 느끼는 오늘도, 사실은 누군가 넘어지며 지켜 낸 바통을 내가 이어받아 쥐고 있는 날입니다. 내 믿음은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달려서 건네준 선물입니다. 이 한 가지만 기억해도 우리는 교만할 수 없고, 또 함부로 주저앉을 수도 없습니다. 먼저 달린 이들 앞에서 겸손히 고개 숙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기 구간을 다 달린 그들이 트랙에서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다음 장면에서, 완주를 마친 그들이 이제 경기장을 빙 둘러선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통을 건넨 선배 주자들이, 이번에는 증인이 되어 우리 곁에 서 있는 것입니다.
둘째, 나를 둘러싼 증인들을 바라봅시다
1813자
둘째로, 지금 나를 둘러싼 증인들을 바라봅시다.
12장 1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여기 '증인'이라고 번역된 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마르튀스'인데, 남의 경기를 심심풀이로 구경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무언가를 '증언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의 증인도 그렇지 않습니까. 재판정에서 자기가 직접 본 것, 자기가 겪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둘러싼 이 사람들은, 자기 인생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이미 달려서 증명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완주한 삶 자체가 오늘 우리를 향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끝까지 붙들면 결코 헛되지 않다."
여기 인생의 마지막 구간을 달린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마라톤이었습니다. 탄자니아에서 온 무명의 선수 존 스티븐 아크와리가 경기 도중 넘어져, 무릎이 찢기고 어깨를 다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피가 흐르는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절뚝이며 계속 달렸습니다. 우승자가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한 시간이 더 지났습니다. 해가 기울고 관중 대부분이 떠난, 거의 텅 빈 경기장으로 그가 마침내 들어섰습니다. 다친 다리를 끌며 마지막 한 바퀴를 도는 그를 향해, 남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박수가 터졌습니다. 왜 그 몸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내 조국은 나를 출발시키려고 이 먼 길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달려 완주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 illust: 존_스티븐_아크와리_멕시코올림픽_완주 -->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도 저마다 넘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오래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어 주저앉은 자리, 마음이 상해 뜨겁던 첫 사랑이 식어 버린 자리, 신앙이 어느새 관성이 되어 버린 자리입니다. 그런데 아크와리에게 마지막 한 바퀴가 남아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아직 달릴 구간이 남아 있습니다. 완주는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끝까지 달린 사람의 것입니다.
믿음의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말씀은, 오늘 나를 지켜보며 점수를 매기는 감시자가 있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나보다 먼저 그 트랙을 달려 본 사람들,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끝까지 완주해 낸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증언으로 서 있다는, 더없이 든든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지금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혼자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 길을 걸어 결승선에 도달한 허다한 사람들의 증언에 둘러싸여, 그 대열의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각자에게 조용히 물어봅시다. 나는 이 증인들 가운데서 어떤 주자로 달리고 있습니까. 예배가 어느새 짐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지쳐 걸음을 멈추고 트랙 밖을 기웃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신실한 증언의 대열 안에 내가 이미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 그 증인들 가운데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준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오늘 내가 이 대열 안에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 든든해질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증인들도 결국 자기를 보라고 우리 곁에 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평생 바라보며 달렸던 그 한 분, 우리도 바라보아야 할 그 한 분을 손끝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제 우리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읍니다.
셋째, 무거운 것을 벗고 예수를 바라보며 달립시다
2030자
셋째로, 이제 무거운 것을 벗고 예수를 바라보며 우리 앞의 구간을 달립시다.
12장 1절 뒷부분과 2절을 보십시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어달리기에서 좋은 주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꺼운 외투를 입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주머니에 짐을 가득 넣은 채로는 잘 달릴 수 없습니다. 뛰기 전에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벗어 놓아야 합니다. 본문은 두 가지를 벗으라고 말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먼저 '무거운 것'입니다. 여기 쓰인 말은 그 자체로 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죄는 아니지만, 달리는 데 짐이 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닌데, 내 마음을 붙들어 하나님께로 가벼이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염려들, 미련들, 지나친 욕심들입니다. 이어달리기 전에 외투를 벗듯이, 우리도 오늘 그 무거운 것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음은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얽매인다는 말이 참 정확합니다. 발목에 감기는 것입니다. 달리려고 하면 자꾸만 발에 감겨 넘어뜨리는 죄가 우리 각자에게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 죄는 다릅니다. 나를 자꾸 넘어뜨리는 그 죄가 무엇인지, 사실 우리 각자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그것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꺼내 놓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만 성도 여러분, 무거운 것을 벗고 죄를 벗는 이 일을, 우리는 이를 악물고 내 힘으로 해내야 하는 숙제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여기에 본문의 가장 깊은 은혜가 있습니다. 본문은 "벗어 버리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곧바로 이렇게 이어집니다. "예수를 바라보자"(12:2).
우리가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는 힘은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시선을 예수께로 옮기는 데서 나옵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두 가지로 부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요. '믿음의 주'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아르케고스'인데, 어떤 길을 맨 앞에서 처음으로 열어 놓는 개척자, 선두 주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하시는 이'는 그 길을 끝까지 달려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경주에서 출발선이자 결승선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이 믿음의 길을 맨 처음 여셨고, 그분이 그 길을 끝까지 달려 완주하셨습니다.
어떻게 완주하셨습니까. 본문은 말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지고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구간을 달려 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승선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이 경주를 완주하신 분, 나를 위해 가장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신 분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내가 벗어야 할 그 죄의 짐을, 이미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신 지셨습니다. 그 은혜를 바라볼 때, 비로소 나를 얽매던 것들이 힘을 잃고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죄를 이겨 내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기에 죄를 벗을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각자, 마음의 눈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어떻겠습니까. 벗어야 할 짐만 자꾸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 무게에 눌려 한 걸음도 떼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먼저 완주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신기하게도 발이 가벼워집니다. 이번 한 주, 마음이 무거워지는 순간마다 단 한 번이라도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참으신 그분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치고 낙심한 주자에게 주시는 처방은 오직 하나입니다. 앞서 완주하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이 무거운 짐에서, 얽매는 죄에서, 나를 낙심시키는 사람과 형편에서 떠나, 십자가를 참으시고 결승선에 이르신 예수께로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 바통을 받아 든 우리
1154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세 가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첫째, 우리보다 먼저 달린 이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받지 못한 약속을 우리가 이미 누리고 있으니, 우리는 겸손히 그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지금 나를 둘러싼 증인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완주한 삶이 나를 향한 증언이 되어, 나는 혼자 달리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셋째, 무거운 것을 벗고 예수를 바라보며 나의 구간을 달리는 것입니다. 그 힘은 내게서 나지 않고, 출발선이자 결승선 되신 예수를 바라봄에서 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운동회의 이어달리기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이어달리기에서 한 주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온 트랙을 혼자 다 뛰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주자보다 빨라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앞 주자가 건넨 바통을 잘 받아, 자기에게 맡겨진 그 한 구간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달리는 것, 그것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 역사를 혼자 짊어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누구보다 훌륭한 신앙인이 되라고 다그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먼저 달린 이들에게서 받아 든 이 믿음의 바통을, 내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구간에서 끝까지 놓치지 않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그 마지막 한 바퀴를, 앞서 완주하신 예수님과 구름 같은 증인들이 지켜보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달리는 구간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습니다. 평탄할 수도 있고, 넘어져 무릎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크와리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출발시키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완주하게 하려고 부르셨습니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예수를 바라보며 내 구간을 끝까지 달려, 언젠가 우리도 저 증인들의 대열에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보다 먼저 이 믿음의 길을 달려 바통을 건네준 수많은 손길을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지치고 낙심하여 주저앉고 싶은 저희 각자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희를 얽매는 무거운 짐과 발목을 감는 죄를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저희 힘으로 벗을 수 없사오니, 십자가를 참으시고 먼저 완주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저희 각자에게 맡기신 오늘의 구간을, 시선을 주님께 고정한 채 끝까지 달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