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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60806-002
버전 v1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목사samuel
예배청년부
본문요한복음12:20-26
날짜2026-08-06 (목)
📝 정식
📋 간략

정식 = 가이드 §10 (말씀 요약 + 본문 이해 + 질문 + 적용). 간략 = 1장, 질문 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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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별 본문 (5개)

서론 — 짐을 부린 자리에 앉아서

815자
버스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짐은 방에 올려 두었고 방 배정도 조금 전에 끝났습니다. 다리는 무겁고 어깨는 뻣뻣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이상하게 붕 떠 있습니다. 한 학기 만에 만난 얼굴들이 반가워서 버스에서부터 계속 웃고 떠들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가라앉아 있고 마음은 떠 있습니다. 그 이중의 상태로 우리는 이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밤 이 예배는 그냥 스쳐 가는 사흘의 첫 순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찬양 몇 곡 부르고 설교 한 편 듣고 방에 올라가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는 익숙한 일정으로 지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우리는 지난 세 주 동안 한 시리즈를 걸어왔습니다. 「죽으러 가기 전에」입니다. 첫 주에 만난 사람은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며 자기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둘째 주의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주님을 등지고 돌아갔고 셋째 주의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밤이 새도록 씨름하며 끝내 놓지 않았습니다. 세 사람이 서 있던 자리는 하나였습니다. 모두 무언가를 손에 쥔 채 주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2주 전에 우리는 종이 한 장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못 내려놓는 한 가지를 적었습니다. 그 종이는 지금 여러분 가방 안에 그대로 있고 적어 넣은 뒤 아직 한 번도 펴 보지 않으셨을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밤은 그 종이를 펴는 밤이 아닙니다. 오늘은 그 종이를 내려놓을 자리를 먼저 눈으로 보는 밤입니다. 그 종이를 가방에 넣은 채 앉아 있는 우리와 꼭 닮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몇 사람입니다. ---

첫째, 뵙고 싶다는 청에 주님은 죽음의 때로 답하십니다 — 20~23절

1891자
### 1) 요청은 사람에게 갔으나, 대답은 죽음의 때로 왔습니다 헬라인 몇 사람이 빌립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청은 조르는 말이 아니라 아주 정중한 한 줄의 부탁이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무리에 섞여 소리치지도 않았고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기도가 이 한 문장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빌립은 이 청을 듣고 혼자 주님께 가지 않았습니다. 먼저 안드레에게 갔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한 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망설였는지 신중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고 다만 두 사람이 함께 갔다고만 적혀 있습니다. 한 사람을 주님께 데려가는 일은 혼자 감당하는 무용담이 아니라 서로를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이 청과 어긋납니다. 사람들이 물은 것은 뵐 수 있느냐였는데 주님이 여신 것은 때가 왔다는 선언입니다. 면회 신청이 접수된 자리에서 일정 조정이 아니라 십자가의 시간표가 열렸습니다. 요한복음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 시계를 미뤄 왔습니다. 가나의 혼인집에서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하셨고 성전에서 붙잡히려 할 때에도 그 때가 아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미뤄지던 시계가 처음으로 뒤집힙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십니다. 그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전 안쪽에는 발도 들일 수 없던 이방인 몇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잠깐 보고 가겠습니다. 유대 사람이 아닌데도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까지 올라온 이방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성전 바깥에 있는 이방인의 뜰까지입니다. 예배하러 왔지만 문 앞까지만 온 사람들입니다. 성전을 향한 약속은 본래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56장 7절입니다. >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 이사야 56장 7절 만민의 기도가 도달할 주소는 이미 열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건물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절이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지 기억하십시오. 그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입니다. > "내가 그 피를 보고 너희를 넘어가리니" — 출애굽기 12장 13절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밤을 기념하러 올라온 사람들이 어린 양 되신 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양은 해마다 다시 드려야 했지만 이분은 단 한 번으로 끝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대답이 죽음으로 열린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 2) 보고 싶다는 것은, 사실 믿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뵈옵고자 한다는 그 말을 다시 봅니다. 요한복음에서 본다는 말은 눈의 일만 아닙니다. 믿는다는 말과 거의 같은 무게로 쓰입니다. 그래서 이 청은 얼굴 한번 보자는 말이 아니라 우리도 믿게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같은 12장 안에 정반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무리입니다. 다 본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아직 못 본 사람들은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뵙고자 하는 그 청이 오늘 밤 우리가 드릴 기도입니다. 뵙기를 구하는 이 청은 성경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평생에 바라는 것을 꼭 한 가지로 줄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쫓기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드린 고백입니다. 시편 27편 4절입니다. >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 시편 27편 4절 성경은 뵙기를 구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자리가 어디였는지를 보십시오. 창세기 22장 2절입니다. >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 번제로 드리라" — 창세기 22장 2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뵌 자리는 아들을 내려놓은 산이었습니다. 뵙는 자리와 내려놓는 자리가 늘 겹칩니다. ---

둘째, 살아남은 밀알은 홀로 남고 죽은 밀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 24~25절

1584자
### 1) 살아남은 밀알이 가장 외로운 결말입니다 23절과 24절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말 바로 다음에 곧바로 밀알 이야기가 옵니다. 영광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왕좌나 환호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어서 붙이신 설명은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에 달려 올라가는 일과 가장 높이 들리는 일을 한자리에서 말합니다. 세상이 가장 낮다고 본 그 높이가 하늘이 부른 영광의 높이였습니다. 이제 24절 한 문장을 보십시오. 한 문장 안에 두 개의 결말이 나란히 놓입니다.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살아남은 밀알에게 남은 것은 안전이 아닙니다. 고립입니다. 한 알 그대로라는 말은 상처가 없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낳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계산을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쥐고 있으면 남고 놓으면 없어진다고 셉니다. 잠언 14장 12절입니다. >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 잠언 14장 12절 학점도 진로도 그 사람과의 관계도 내가 관리하는 동안은 언제나 안전해 보입니다. 그렇게 지키는 데 성공한 인생이 결국 한 알 그대로 남습니다. 25절이 그 계산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한다고 하십니다. 목숨을 껴안은 손은 결국 빈손이 되고 놓은 손에 영원이 남습니다. ### 2)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 밀알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밀알의 첫 번째 주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앞 절이 주어를 못 박아 두었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셨습니다. 땅에 떨어지는 그 한 알은 먼저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 이 본문은 우리도 희생하자는 권면이 아닙니다. 내가 밀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이 되신 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순서가 뒤바뀌면 이 말씀은 무너집니다. 내가 먼저 죽어 보겠다고 나서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다짐이 됩니다. 다짐은 이 사흘도 못 버팁니다. 주님이 먼저 떨어지셨고 그 떨어진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사야 53장 10절입니다. >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 이사야 53장 10절 죽음이 끝이 아니라 씨를 보는 자리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6절입니다. >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 고린도전서 15장 36절 부활을 설명할 때에도 그림은 같았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과 35절입니다.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 마가복음 8장 34~35절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 갈라디아서 2장 20절 바울은 자기가 스스로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내 결심이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에 내가 얹혀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죽은 사람은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갑니까. 주님은 그 다음을 섬김이라 부르십니다. ---

셋째, 내가 시작한 섬김의 마지막 문장은 아버지께서 쓰십니다 — 26절

1267자
### 1) 섬김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26절은 조건을 하나 내걸고 시작합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섬기려면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봉사도 헌금도 수고도 여기 없습니다. 따라오라고만 하셨습니다. 이것은 활동이 아니라 자리를 옮기는 일입니다. 이어지는 말이 그것을 그대로 확인해 줍니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 하십니다. 곳과 거기라는 말이 연달아 나옵니다. 섬김이 장소의 문제로 정의됩니다. 그러면 그분이 계신 곳은 어디입니까. 두 절 앞에서 이미 말씀해 두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진 그 흙입니다. 섬김의 자리는 무대가 아니라 땅바닥입니다. 신명기 30장 19절과 20절입니다. > "생명을 택하고 … 그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그에게 부종하라" — 신명기 30장 19~20절 부종하라는 말은 붙어 있으라는 말이고 따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입니다.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 로마서 14장 8절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결국 한 자리 안에 있습니다. ### 2) 사람의 동사로 시작해, 하나님의 동사로 끝납니다 26절을 천천히 다시 따라가 보십시오. 섬긴다는 말이 한 절 안에 세 번 나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주인이 바뀝니다. 처음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사람의 결단입니다. 다음은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주님과 함께 있는 동행입니다. 마지막은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아버지의 응답입니다. 사람의 동사로 시작한 문장이 하나님의 동사로 끝납니다. 내가 시작한 섬김의 마지막 문장은 내가 쓰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쓰십니다. 우리가 내려놓기를 두려워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놓으면 그 뒤가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내가 관리하지 않으면 다 무너질 것 같아서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뒤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신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7절과 9절입니다. >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 빌립보서 2장 7절, 9절 낮아짐 다음에 오는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주님도 자기를 높이지 않으셨고 아버지께서 그분을 높이셨습니다. 시편 116편 15절입니다. >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 시편 116편 15절 세상은 놓친 것을 손해로 계산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귀중하다고 세십니다. 서로 다른 장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

결론 — 오늘은 그 자리를 보는 밤입니다

853자
여러분의 가방 안에 종이 한 장이 있습니다. 2주 전에 여러분이 직접 적은 종이입니다. 거기에는 못 내려놓는 한 가지가 적혀 있고 아직 한 번도 펴 보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밤에도 그 종이는 펴지 않으시겠습니다. 저는 두 가지만 부탁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첫째,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정직하게 봅시다. 우리도 헬라인들처럼 뵙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하려고 이 수련회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손은 여전히 무언가를 쥔 채입니다. 쥔 채로 만나 뵙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어긋남을 오늘 밤 처음으로 인정합시다. 긴 회개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하는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둘째, 눈을 들어 그 자리를 바라봅시다. 주님이 우리보다 먼저 내려가신 자리입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진 흙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자리를 보기만 하겠습니다. 가방 속 종이는 그대로 두십시오. 다만 그 종이를 사흘 동안 이 자리 앞에 놓아두기로 결단합시다. 꺼내는 날은 오늘이 아닙니다. 그러나 놓을 자리를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아무것도 놓지 못합니다. 조금 전 우리는 짐을 부리고 이 의자에 앉았습니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붕 떠 있었습니다. 그 몸과 그 마음 그대로 괜찮습니다. 주님은 준비가 끝난 사람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는 그 한 줄을 들으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한 줄에 십자가를 꺼내셨습니다. 사흘 동안 우리는 그 자리 앞에 앉아 있겠습니다. 이 사흘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가 쓰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손에 이 사흘을 맡기고 시작하는 청년부 패밀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