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0260816-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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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목사samuel
예배청년부
본문느헤미야2:1-8
날짜2026-08-16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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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도입↔서론 / 본문↔본론 / 마무리↔결론 / 결단↔결단찬양 / 기도↔기도제목
섹션별 본문 (8개)
봉독 — 느헤미야 2장 1절부터 8절
714자
> 1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 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 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 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 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 6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 7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 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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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그 사이의 날들
1110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다시 이 자리에서 뵙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때 그 마음, 아직 있습니까." 그 질문이 얼마나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물으면 우리는 둘 중 하나를 하게 됩니다. 없는 뜨거움을 있는 척하거나, 아니면 고개를 숙이고 나는 역시 안 되는 사람이라고 조용히 결론을 내리거나. 저는 오늘 여러분이 그 두 가지를 다 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수련회에 함께 가지 못한 분들도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분들은 오늘 말씀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까 걱정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수련회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이 한번 뜨거워졌다가 식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자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새해 첫날 세운 계획, 큰 결심을 하고 잠든 밤,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다음 주. 그 자리를 아는 분이라면 오늘 말씀은 그대로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수련회 둘째 밤에 우리는 느헤미야 1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느헤미야 1장 4절,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무너진 성벽 소식을 듣고 주저앉은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우리가 미처 다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운 날짜와, 느헤미야가 움직인 날짜입니다.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그리고 오늘 본문 2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유대 사람들의 달력에서 기슬르월은 아홉째 달이고, 니산월은 첫째 달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겨울로 들어서는 무렵에 울었고, 봄이 되어서야 왕 앞에 섰다는 뜻입니다. 그 사이가 넉 달입니다.
성경은 그 넉 달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무너진 성벽 소식을 듣고 주저앉아 울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다음 장면은 넉 달이 지난 어느 날 왕의 식탁 앞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경은 말해 주지 않습니다.
저는 그 침묵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지금 그 사이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뜨거웠던 밤은 지나갔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이 시간 말입니다.
첫째 — 넉 달이 지나도 그 수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655자
1절 끝을 보시겠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이 한 문장이 넉 달을 증언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는 왕 앞에서 이런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감춰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의 직업을 생각해 보십시오. 1장 마지막 절이 그의 신분을 알려 줍니다. 그는 왕의 술 관원이었습니다. 왕이 마실 포도주를 먼저 맛보아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잔을 올리는 자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의 목숨이 걸린 자리이니 왕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가장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표정은 그냥 표정이 아닙니다. 얼굴이 곧 직무입니다. 왕의 식탁 앞에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술 관원이라니,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사고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이 장면은 느헤미야가 큰마음 먹고 용기를 낸 장면이 아닙니다. 넉 달이나 눌러 왔는데 그날은 끝내 눌러지지 않은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감정이 식는 것과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다릅니다.**
수련회에서 울었던 그 눈물은 지금 없을 것입니다. 그때 부르던 찬양을 지금 다시 틀어도 그날처럼 되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눈물은 원래 그 자리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눈물이 마른 것과 마음이 사라진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넉 달 동안 느헤미야는 울고 있지 않았습니다. 평소처럼 잔을 올렸고 평소처럼 궁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있던 것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넉 달이 지난 어느 날, 그것이 얼굴로 새어 나왔습니다.
시편 기자도 이 시간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편 126편 5절과 6절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는 날과 거두는 날 사이에는 반드시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시간이 끼어 있습니다. 씨를 뿌린 사람이 그다음 날 밭에 나가 보면 땅은 어제와 똑같습니다. 그렇다고 씨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자라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안에 아무 감동이 없다고 해서 그날 밤이 가짜였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여쭙고 싶습니다. 그날 마음에 걸렸던 그 한 가지가, 지금도 여전히 마음에 걸립니까. 문득문득 생각납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뜨거움은 증거가 아닙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이 증거입니다.
3절에서 느헤미야가 왕에게 대답합니다.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저는 이 대답을 볼 때마다 놀랍니다. 이것은 울음이 아니라 문장입니다. 왕 앞에서 떨면서도 자기가 왜 이런 얼굴인지를 한 문장으로 설명해 냅니다. 넉 달 전 그는 주저앉아 울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넉 달이 지나자 그 울음이 말이 되어 나왔습니다. 그 넉 달 동안 그는 자기 마음속에서 이 문장을 몇 번이나 되뇌었을까요.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이렇게 썼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낙심이 찾아오는 자리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열심히 하다가 실패한 자리가 아닙니다. 아무 반응이 없는 자리입니다. 느헤미야에게 그 넉 달이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둘째 — 두려움과 기도가 같이 있었습니다
1889자
2절 끝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느헤미야는 담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아니었습니다. 왕이 얼굴빛을 지적한 그 순간, 그는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직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움이 없는 사람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면서 말한 사람으로 그립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이렇게 오해합니다. 믿음이 생기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사라져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남아 있으면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하고 미룹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두려움이 사라진 다음에 입을 연 것이 아니라, 크게 두려워하는 그 상태로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4절, 오늘 본문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이 장면을 천천히 그려 보십시오. 왕이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제 대답할 차례입니다. 왕 앞에서 뜸을 들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몇 초입니다. 어쩌면 그보다 짧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몇 초 사이에 일이 하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느헤미야가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지도 못했습니다. 눈을 감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왕도 몰랐고 곁에 앉은 왕후도 몰랐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느헤미야만 아는, 왕의 질문과 신하의 대답 사이에 끼어 있는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산 아래에서 드리는 기도의 모습입니다.
수련회에서 우리가 드린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불을 낮추고, 찬양이 흐르고, 옆 사람도 함께 울고 있었습니다. 마음껏 소리 낼 수 있었고 시간도 넉넉했습니다. 그 기도가 좋은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산을 내려온 다음에는 그런 자리가 거의 없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각이고, 수업이 있고, 교수님이 부르고, 팀장이 부르고, 어머니가 부릅니다. 기도할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수련회 마지막 날 아침에 우리는 이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산을 내려가는 것은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자리가 옮겨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말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 줍니다. 예배의 자리가 옮겨지면 기도의 모양도 함께 옮겨집니다. 자리가 옮겨졌는데 예전 모양의 기도만 찾고 있으면, 우리는 기도를 못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자리가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남긴 한 마디가 여기서 이해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저는 오랫동안 이 말씀이 부담스러웠습니다.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있으라는 말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이 장면을 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기도의 길이를 늘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기도가 들어갈 수 없는 자리를 없애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왕의 식탁 앞에도 기도는 들어갔습니다.
느헤미야가 그 몇 초 사이에 무슨 말을 했는지 성경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한 문장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입니다." 그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한 문장이 넉 달의 기도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1장 6절에서 그는 주야로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넉 달 동안 밤낮으로 드린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몇 초짜리 기도가 허공에 뜨지 않았습니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에게도 그 몇 초가 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하는 순간,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 먼저 사과해야 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눈을 감을 필요도 없고 자리를 뜰 필요도 없습니다. 대답하기 직전에 속으로 한 문장만 올려 드리십시오. 그것이 본문이 보여 주는 산 아래의 기도입니다.
셋째 — 허락하신 분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1949자
이제 5절부터 8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왕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그 요청이 놀랍도록 구체적입니다.
6절에서 왕이 묻습니다.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그러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기한을 정하고." 즉시 답이 나왔다는 뜻입니다. 7절에서는 강 서쪽 총독들에게 보낼 조서를 구합니다. 오늘로 말하면 통행 허가서입니다. 8절에서는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보낼 조서까지 구합니다. 성문과 성곽과 자기가 들어가 살 집에 쓸 들보 재목을 달라는 것입니다. 담당자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즉흥적으로 나올 수 있는 말입니까. 왕이 물었을 때 얼떨결에 만들어 낸 대답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넉 달 동안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굴려 본 사람의 대답입니다.
여기서 그 넉 달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 넉 달은 빈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그 기간에 느헤미야는 기도했고, 알아봤고, 계산했고, 준비했습니다. 성벽을 다시 쌓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거기까지 가려면 어떤 문서가 있어야 하는지, 재목은 누구에게 받아야 하는지 하나하나 확인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결심이 식었다고 말할 때, 사실 식은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만 뜨겁게 두고 손은 가만히 두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마음이 식지 않도록 붙든 것이 아니라 손을 움직여 두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그 손을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준비마저 느헤미야 혼자 짜낸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소원을 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행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넉 달 동안 느헤미야 안에서 그 마음이 꺼지지 않게 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잠언 16장 9절도 같은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계획은 사람이 세웁니다. 그러나 걸음은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문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잘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보십시오. 8절 마지막입니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성경은 "내가 준비를 철저히 했으므로 왕이 허락하고"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내 말솜씨가 좋았으므로"라고도 쓰지 않았습니다. 넉 달을 준비한 사람이 마지막에 붙인 문장이 이것입니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보겠습니다. 1장 11절, 느헤미야가 넉 달 전에 드린 기도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여기서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왕입니다. 넉 달 전에 그는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8절에서 왕이 허락합니다. 기도와 응답이 정확히 한 쌍으로 놓여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순간에,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왕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고백을 혼자 간직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사람들 앞에서 한 첫마디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2장 18절입니다.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자기가 넉 달 동안 얼마나 애썼는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성벽은 오십이 일 만에 완성됩니다. 느헤미야 6장 16절은 그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결론 — 물어야 할 질문
1536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수련회 마지막 날 우리는 종이 한 장씩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그 종이를 책상 위나 다이어리 첫 장에 붙여 두자고 했습니다. 오늘 그 종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가방 안쪽 주머니에서 아직 못 꺼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다만 질문 하나만 바꾸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자꾸 이렇게 묻습니다. "내 결심이 며칠이나 갔나."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물으라고 가르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수심이 아직 있는가."** 그날 마음에 걸렸던 그 한 가지가 지금도 문득 마음에 걸립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서 그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넉 달을 견딘 느헤미야처럼, 지금 여러분은 그 사이의 날들을 지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 한 주간 두 가지를 함께 해 보겠습니다.
**첫째, 대답과 대답 사이에서 기도하겠습니다.**
따로 시간을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번 주에 반드시 그런 순간이 옵니다. 말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미루고 싶은 순간, 먼저 손 내밀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그 자리에서 느헤미야처럼 한 문장만 올려 드리십시오. "하나님, 지금 도와주십시오." 그 몇 초가 여러분의 하루를 예배로 만듭니다.
**둘째, 마음 대신 손을 움직이겠습니다.**
그날 마음에 걸렸던 그 한 가지를 놓고, 이번 주에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 하나를 정하십시오. 화해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오늘 연락처를 찾아 놓는 것까지가 그 일입니다. 다시 붙들어야 할 말씀이 있다면 성경을 펴 놓는 자리까지 정해 두는 것이 그 일입니다. 크지 않아도 됩니다. 느헤미야도 성벽을 쌓기 전에 재목이 어디 있는지부터 알아보았습니다. 감동이 식은 자리를 지키는 것은 더 큰 감동이 아니라 준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며칠이나 갈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넉 달을 건너게 하신 분이 계십니다.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우리의 지구력이 아닙니다. 시작하신 분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수련회 마지막 날 우리는 내가 며칠 버티느냐가 아니라 나를 붙드신 그 자비가 며칠 가느냐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고백에 도장을 찍어 줍니다.
그날 밤 여러분을 울게 하신 분이 여러분을 준비시키실 것이고, 때가 되면 문을 여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셨다고 말입니다.
수련회에서 우리는 이사야 58장 12절 말씀으로 한 사람이 되자고 했습니다.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그 이름은 뜨거웠던 하룻밤에 붙는 이름이 아닙니다. 넉 달을 건너간 사람에게 붙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2장 1절이 말한 대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그 영적 예배는 산 위가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발 딛고 선 그 자리에서 드려집니다.
산 위에서 받은 것을 산 아래에서 잃지 않고, 그 사이의 날들을 하나님의 선한 손에 붙들려 건너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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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제목
197자
1. 감동이 식은 자리에서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게 하시고, 마음에 남아 있는 그 한 가지를 살아 있는 은혜로 알아보게 하옵소서.
2. 두려움이 사라진 다음에 움직이려 하지 않게 하시고, 두려운 채로도 입을 열고 손을 내밀게 하옵소서.
3.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이 시간에도 준비하게 하시고, 문이 열릴 때 주의 선한 손을 알아보게 하옵소서.
나눔 질문
213자
1. 수련회에서, 혹은 최근에 마음에 걸렸던 한 가지가 지금도 문득 떠오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나눠 주십시오.
2. 느헤미야는 왕의 질문과 자기 대답 사이에서 기도했습니다. 이번 한 주, 내 하루에서 그런 몇 초가 생길 만한 자리는 어디입니까.
3. 마음만 뜨겁고 손은 움직이지 않아 흐지부지된 경험이 있다면 나눠 주십시오. 이번에는 무엇을 가장 작은 한 걸음으로 정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