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0260919-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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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족, 신실하신 하나님 [풀원고]
목사samuel
예배청년부
본문창세기 46:8-27
날짜2026-09-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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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도입↔서론 / 본문↔본론 / 마무리↔결론 / 결단↔결단찬양 / 기도↔기도제목
섹션별 본문 (6개)
본문 봉독 — 창세기 46:8–27
919자
> 8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 9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 10 시므온의 아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요
> 11 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 12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
> 13 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
> 14 스불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
> 15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난 자손들이라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삼 명이며
> 16 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 17 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은 헤벨과 말기엘이니
> 18 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레아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육 명이라
> 19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 20 애굽 땅에서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 21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 22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사 명이요
> 23 단의 아들 후심이요
> 24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 25 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칠 명이라
> 26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 27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서론 —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내려가십니까?
1108자
지난 본문에서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고, 야곱과 함께 내려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낯선 길을 걸을 수 있는 근거가 앞날을 다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요셉과 야곱이 만나는 장면이 나올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습니까?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쉽게 믿지 못했던 아버지입니다. 이제 길을 떠났으니, 우리도 그 두 사람이 만나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만남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긴 이름 목록을 들려줍니다. 르우벤의 아들들, 시므온의 아들들, 레위와 유다의 아들들. 익숙한 이름도 있지만, 어떤 이름은 지금 읽고도 금방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왜 여기서 이 이름들을 들려줄까요? 7절에서 이미 야곱의 모든 자손이 함께 애굽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 한 문장으로 이동을 설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가족에 속하는지 다시 적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내려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은 그 약속을 듣고 내려가는 가족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씀이 어떤 사람들의 실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지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약속은 훌륭한 문장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가족, 가나안을 떠나는 가족,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어집니다.
그 가족을 마지막에 어떻게 부르는지 27절을 보십시오. ‘야곱의 집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수를 칠십 명이라고 기록합니다.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들었는데,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작은 가족입니다. 그 이름들을 살펴보면 자랑스러운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가족의 역사 속에서 약속을 이어 가십니다.
오늘은 이 이름들을 통해 세 가지를 보겠습니다. 작아 보이는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부끄러운 과거 앞에서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들이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작은 가족에게도 약속을 이어 가십니다
3390자
### 1) 큰 약속과 작은 현재 사이에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보충 본문: 창세기 12:2–3, 신명기 10:22
먼저 8절과 27절을 연결해 보겠습니다. 8절은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27절은 그 가족을 칠십 명으로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민족을 약속하셨는데, 아직 그 완성된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 약속은 야곱에게 갑자기 처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하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시면서 큰 민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이 커지는 데서 멈추지 않고,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 일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복이 흘러가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을 지나 이삭, 이삭을 지나 야곱에게 왔습니다. 자손들이 생겼습니다. 아들들뿐 아니라 손자들의 이름도 나옵니다. 그렇다고 이미 세상이 주목할 강대한 민족이 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들은 기근을 피해 다른 나라로 들어가는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먹을 것이 필요하고 살아갈 자리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숫자를 잠깐 구분하고 넘어가겠습니다. 26절의 육십육 명은 야곱과 함께 간 혈족을 세면서 며느리들은 제외한 수입니다. 27절은 이미 애굽에 있던 요셉과 그곳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언급하며 야곱의 집을 칠십 명으로 요약합니다. 그래서 이 목록을 그날 국경을 넘은 사람의 전체 인원표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며느리들도 함께 갔고, 요셉과 두 아들은 먼저 애굽에 있었습니다.
이 구분을 하고 나면 우리가 볼 것이 분명해집니다. 본문은 거대한 군대나 완성된 국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백성이 지금 어떤 가족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직 작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칠십 명을 성경의 다른 곳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겠습니다. 신명기 10장 22절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상들의 시작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 22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모세는 그때의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많은 백성을 보게 합니다. 이 두 장면을 연결하는 주어가 누구입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입니다. 조상들이 자기 가능성을 잘 관리해서 큰 민족이 되었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많게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작은 가족이 보입니다. 신명기에서는 그 가족에게 주신 약속을 이어 오신 하나님이 보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크기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루실 일을 다 보여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현재의 모습만 보고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기대했던 만큼 달라지지 않은 자신을 보고,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아직 작은 변화밖에 보이지 않는 삶을 보면서, 그동안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묻습니다.
물론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만으로 성장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돌아보아야 할 게으름이 있다면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보여 줄 만큼 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씀을 듣고 돌이키고 다시 기도하는 지금의 걸음까지 무가치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스스로 크게 보일 때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 2) 우리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의지합니다
보충 본문: 신명기 7:7–9
그렇다면 작은 가족이 큰 민족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도 작게 시작하면 나중에 반드시 크게 성공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성경이 그 백성에게 무엇을 기억하라고 했는지 더 들어 보아야 합니다.
신명기 7장 7절부터 9절을 보겠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앞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택하고 애굽에서 건져 내셨는지 설명합니다.
>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수효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적었다고 하십니다.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셨다고 말씀합니다. 백성의 크기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더 크게 보이라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라고 합니다. 작은 것을 무조건 좋다고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많든 적든,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격을 세우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커져야 비로소 사랑받을 가치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정받을 만한 결과가 있어야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할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맡은 역할이 커야 믿음도 쓸모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큰 민족이 된 다음에야 하나님의 사랑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그들의 역사에 먼저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를 성과로 바꾸어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은혜를 더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지금 약하다고 주님께 나아갈 길이 닫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의 적용은 ‘작아도 언젠가 크게 될 테니 기다리자’가 아닙니다. **‘크기를 증명하느라 하나님을 놓치지 말고, 지금 나를 부르시는 말씀에 충실하자’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경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작아 보이지 않으려고 내 형편을 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부담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오늘 맡겨진 작은 책임을 정직하게 감당하십시오. 그것이 나를 크게 만들어 줄 거래라서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크기의 문제를 넘어서면 더 어려운 질문이 남습니다. 이 가족이 작은 것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믿음과 인격에서는 남다른 사람들이었을까요? 이제 그 이름들에 남아 있는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2. 하나님은 죄의 역사를 통과하여 은혜의 길을 여십니다
3536자
### 1) 성경은 이 가족의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지 않습니다
보충 본문: 창세기 38:26
오늘의 명단에서 1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 12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
이름만 이어지던 문장 가운데 죽음에 대한 설명이 들어옵니다. 엘과 오난이 가나안 땅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애굽으로 가는 사람을 셀 때 더할 수 있는 생존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가족의 계보를 기록할 때 그 이름과 죽음이 함께 남아 있습니다.
창세기 38장을 읽으면 이 말의 무게를 알 수 있습니다. 엘과 오난의 죽음은 그들의 악과 연결되어 기록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약속의 가족이라는 이름이 죄를 가볍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이 목록은 그 가족의 모든 사람이 훌륭하게 살았다는 추천서가 아닙니다.
그 뒤에는 베레스와 세라가 나옵니다. 이 이름들도 앞선 창세기 38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셋째 아들 셀라를 주겠다고 했지만, 셀라가 자란 뒤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유다는 다말을 알아보지 못한 채 관계를 맺었고,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처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말이 내놓은 물건들을 보고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그때 유다가 한 말이 창세기 38장 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유다는 다말을 향하던 판단을 거두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합니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 말은 다른 사람의 잘못만 말해서는 자기 일을 설명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오늘의 명단에는 그 역사 속에서 태어난 베레스와 세라가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후의 역사를 말하기 위해 앞선 잘못을 감추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워서 깨끗한 가문으로 꾸미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말할 때 나에게 유리한 부분을 먼저 고릅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는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했는지 말할 때는 문장이 짧아집니다. 혹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길게 설명하여 내 책임이 잘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합니다.
물론 누군가에게 당한 상처를 자기 죄처럼 떠안을 필요는 없습니다. 남이 저지른 일을 나의 잘못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에게 실제 책임이 있는 일은 다른 사람 이야기 뒤에 숨겨서는 안 됩니다. 유다의 고백처럼 ‘내가 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고백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은혜를 믿기에 거짓으로 나를 지킬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일을 먼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있는 죄를 죄라고 부르며,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부끄러운 역사를 보여 주면서, 그 가족에게 더는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까? 베레스의 이름이 성경의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겠습니다.
### 2) 그 이름들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보충 본문: 마태복음 1:2–3, 로마서 3:23–24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시작합니다. 신약성경을 펼쳤는데 그 첫 장에서도 이름들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장 2절과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오늘 읽은 이름들이 다시 나옵니다. 야곱, 유다, 베레스, 헤스론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다를 기록하면서 다말의 이름도 분명히 적습니다. 창세기의 부끄러운 장면을 감추어 놓고 예수님의 계보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연결은 이름이 비슷하니까 붙여 보는 연결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이어진 가족의 계보가 마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실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죄가 없던 사람들의 역사만을 골라 구원의 길을 마련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유다의 잘못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베레스가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 앞의 죄가 선한 행동으로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죄를 죄로 기록하면서도, 그 죄가 하나님의 약속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권한을 갖지는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계보 끝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과거를 잊어버리라고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분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과 24절을 보겠습니다.
>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3절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로움이 없음을 말합니다. 24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 내시는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우리가 값없이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죄가 아무 값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증명하는 것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주님께서 담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의 잘못 때문에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 잘못을 없던 일이라고 생각해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용서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 둘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합니다. 나를 정당화하면서 죄를 부인하거나, 죄를 인정한 뒤에는 나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둘 다 내려놓게 합니다. 죄를 숨기지 않게 하시고, 동시에 그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번에 주님 앞에서 정확히 인정해야 할 일이 있다면, 먼저 그 일을 다른 말로 포장하지 마십시오. 누군가에게 사과해야 한다면 내 사정만 길게 말하지 말고, 내가 한 일을 분명히 말하십시오.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면 감당하십시오. 그것으로 용서를 사려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이 더는 거짓 뒤에 숨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내 가족의 과거 때문에 자신까지 부끄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 좋은 가정에서 시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는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계보 자체가 결함 없는 가문의 자랑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자랑스러운 출신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고, 죄인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과거를 깨끗하게 편집하는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보겠습니다. 은혜는 나 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데서 끝날까요? 하나님께서 붙드신 사람들은 누구와 함께 살아가게 됩니까?
3. 하나님은 은혜로 부르신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세우십니다
3730자
### 1)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어도 한 집에 속합니다
핵심 본문: 창세기 46:19–20, 26–27
오늘의 명단은 네 가족군으로 배열됩니다. 레아의 자손들, 실바의 자손들, 라헬의 자손들, 빌하의 자손들입니다. 서로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들들과 그 후손들을 구분하여 적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들을 야곱의 집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가족이 처음부터 서로를 잘 이해하고 사랑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읽으며 그 안의 편애와 시기를 보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았고, 야곱은 오랫동안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서로 다른 가족들이 애굽에 있게 되는 장면 앞에 서 있습니다.
여기서 19절과 20절을 보겠습니다.
> 19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 20 애굽 땅에서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은 이미 애굽에 있었습니다. 지금 야곱을 따라 가나안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먼저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애굽에서 태어났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기근 가운데 식량을 구하는 과정을 거쳐 이제 이곳으로 옵니다.
그 길들은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7절은 그들을 함께 야곱의 집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었고 다른 가족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왔지만, 본문은 성공한 요셉의 이름만 적고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제들과 다음 세대의 이름까지 들려줍니다.
우리는 요셉의 높은 자리에서 이야기의 결론을 찾기 쉽습니다. 억울했던 사람이 성공했고, 그를 무시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으니 결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미 45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먼저 보내 가족의 생명과 후손을 보존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의 이름들은 바로 그 보존되는 가족이 누구인지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명단을 읽으면서 요셉 한 사람만 크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한 사람이 성공했다는 증명서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속한 가족과 후손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우리도 은혜를 너무 개인적인 질문 안에 가두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회복되었는가’, ‘내가 어디까지 왔는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누구를 돌보고, 누구와 함께 살아가게 하시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먼저 자리를 잡았고, 누군가는 아직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성경을 오래 배웠고, 누군가는 교회에 처음 와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 차이가 누구는 중심에 있고 누구는 주변에 있어도 된다는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야곱의 혈통으로 연결된 이 가족과 오늘의 교회를 곧바로 같은 것으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를 이어 주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신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보겠습니다.
### 2)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함께 세워지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보충 본문: 갈라디아서 3:26–29, 에베소서 2:18–22
갈라디아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자신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속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특정한 혈통이나 자신이 이룬 조건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부터 29절을 읽겠습니다.
>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오늘 창세기의 약속을 남의 집안 이야기로만 읽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야곱의 혈통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약속을 이루시는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라는 말도 나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합니다. 서로의 삶과 배경이 똑같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차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격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이유로 더 깊이 속한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믿음을 늦게 갖게 되었다는 이유로 자신은 계속 손님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모두에게 같습니다. 오래된 사람에게는 공로의 문이 열리고, 처음 온 사람에게만 은혜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로 나아갑니다.
에베소서 2장도 같은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막힌 관계를 허무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셨다는 문맥입니다. 18절부터 22절을 보겠습니다.
>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18절은 같은 성령 안에서 같은 아버지께 나아감을 말합니다. 19절은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집에 속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2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신앙을 완성한 다음에 잠깐 모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함께 세워지는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향한 책임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서만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주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보는 질문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나와 잘 맞는가’, ‘내게 도움이 되는가’에서만 멈추지 말고,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을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예배는 함께 드리지만 대화를 시작하기 어려워 늘 혼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친한 사람들끼리는 잘 지내지만, 새로 온 사람은 관계 안으로 들어갈 틈을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리가 편안해질수록 누군가에게는 그 자리가 닫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가 끝난 뒤 늘 이야기하던 사람들만 찾지 말고, 아직 잘 모르는 한 사람에게 먼저 인사해 보십시오. 조급하게 속사정을 묻거나 억지로 친해지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름을 묻고, 다음에 만났을 때 그 이름을 기억하며 인사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모든 문제를 덮어 주지는 않습니다. 잘못된 행동은 바로잡아야 하고, 상처받은 사람에게 무조건 참고 가까이 지내라고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은 책임을 피하는 구호가 아니라, 진실하게 사랑하고 안전하게 돌보라는 책임입니다.
**우리는 서로 잘 맞아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이 아닙니다. 같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에,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결론 — 이름들은 지나가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어집니다
1395자
보충 본문: 출애굽기 1:6–7
오늘 읽은 이름들을 다 외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왜 성경이 이 가족을 보여 주는지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 가족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가족의 역사에는 죄와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죄로 다루시면서도, 이 역사를 통과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어지는 약속의 길을 열어 가셨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길을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들을 야곱의 집이라고 함께 부릅니다.
그리고 다음 책인 출애굽기는 이 가족의 이름을 다시 부르며 시작합니다. 그 뒤 1장 6절과 7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한 세대는 죽었습니다. 요셉도, 그의 형제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가족에게 하신 약속은 그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뒤에 오는 세대의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움 없는 길만 걸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후에는 고된 종살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내 크기만 바라보며 믿음을 판단하지 맙시다. 자랑할 만한 것이 있어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는 대신 그리스도의 용서를 의지하고, 내 삶만 지키려는 자리에서 함께 부름받은 사람을 돌보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출신이 그 길을 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공이 그 자리를 산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갑니다.
**우리의 현재가 작아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의 과거가 부끄러워도 그리스도께 나아갈 길은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부름받은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죄를 숨기기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며, 함께 부름받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우리 청년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작아 보이는 현재 때문에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죄를 다른 말로 가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의지하며 정직하게 주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 은혜를 혼자 누리려 하지 않고 같은 은혜로 부르신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리 청년 공동체가 서로의 자격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자라 가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