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202606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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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짓는 예배, 사랑 없는 소음
목사taejin
예배청년부
본문고린도전서 13:1-7, 14:26-40
날짜2026-06-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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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도입↔서론 / 본문↔본론 / 마무리↔결론 / 결단↔결단찬양 / 기도↔기도제목
섹션별 본문 (12개)
본문 봉독 — 고린도전서 13장 1-7절
381자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리고 14장 26절, 40절
138자
>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6절)
>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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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229자
한 주간도 예배자이셨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매주 이 자리에 모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서로 안부를 묻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 모임 한복판에 칼처럼 질문 하나를 박아 넣습니다. *그 모든 것의 바닥에, 사랑이 있느냐.*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질문 앞에 서고 싶습니다. **사랑이 공동체의 예배를 세웁니다.** 사랑이 빠지면, 아무리 화려한 예배도 소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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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 사랑의 화신, 그러나
684자
여러분, 캘커타의 어머니라 불린 마더 테레사를 아십니까? 인도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한센병자의 발을 씻기고, 그 한 사람을 위해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분입니다. 우리는 그녀를 '사랑의 화신'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10년 뒤, 비밀로 보관되어 있던 편지들이 책 한 권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50년 동안 영적 지도자들에게 쓴 사적인 편지였습니다. 거기에 세상이 몰랐던 한 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자기 마음이 어둡다는 것, *일은 가득한데 그 안에 사랑이 메말랐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이 많다고 알려진 사람이, 자기 내면에선 사랑이 비어 있다고 평생을 물었습니다. 고아원, 호스피스, 구제소 — 일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들의 바닥에 사랑이 흐르는지 매일 점검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13장 1절부터 3절이 바로 이 질문입니다. "내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줘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 우리는 이 사랑장을 흔히 결혼식에서 듣습니다. 그래서 신랑신부에게 주는 예쁜 시 정도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건 결혼식에서 낭독하라고 쓴 시가 아닙니다. 사역에 바쁘고 은사 많은 교회 사람들에게 던진, 칼날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너희 그 많은 사역의 바닥에, 진짜 사랑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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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시끄러운 교회
622자
이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한마디로 *재능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방언하는 사람, 예언하는 사람, 지식이 뛰어난 사람 — 은사가 차고 넘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은사가 자랑거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고린도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두 바다를 잇는 길목에 자리 잡아, 돈과 사람이 몰려들고, 누가 더 잘났는지 끊임없이 겨루는 도시였어요. 한마디로 *비교와 경쟁의 도시*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인스타에 성공한 사람들 사진이 끝없이 올라오는, 그런 분위기의 도시였던 거예요. 그 경쟁 문화가 교회 문을 넘어 안으로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내 은사가 네 은사보다 위다." 방언하는 사람은 방언 못 하는 사람을 한 수 아래로 봤고, 서로 자기가 더 영적이라고 으스댔습니다. 예배 시간에 서로 더 큰 목소리를 내려고 다툰 겁니다. 모이긴 모이는데, 세워지는 게 아니라 시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장에서 14장까지, 이 은사 문제를 길게 다룹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 정확히 12장과 14장 사이에 13장 사랑장을 박아 넣습니다. 여러분, 이게 우연이 아닙니다. 사랑장은 은사 다툼에 대한 바울의 *해답*입니다. "너희 문제의 답은 더 큰 은사가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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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메시지
378자
오늘 우리는 두 본문을 하나로 봅니다. 13장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14장은 *그 사랑이 모임에서 어떻게 흐르는가*를 말합니다. 13장이 설계도라면, 14장은 그 설계도로 실제 집을 짓는 현장입니다. 둘은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한 흐름입니다. 그래서 오늘 두 본문을 하나로 묶어 보는 겁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같은 은사라도, 사랑이 없으면 예배를 시끄럽게 만들고, 사랑이 있으면 예배를 세웁니다. 같은 모임인데 누구는 무너뜨리고 누구는 짓습니다. 그 차이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 가지로 함께 나누겠습니다. 첫째, 사랑 없는 은사는 소음이라는 것. 둘째, 사랑은 자기를 내려놓는다는 것. 셋째, 그 사랑이 함께 드리는 예배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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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사랑 없는 은사는 예배가 아니라 소음입니다
1624자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러분, 바울이 왜 하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를 들었을까요? 고린도 거리에는 우상을 섬기는 제사가 많았습니다. 그 제사에서 시끄러운 징과 꽹과리를 두드렸어요. 그러니까 바울의 말은 충격적입니다. *사랑 없는 너의 화려한 은사가, 사실은 우상 제사의 시끄러운 소음과 똑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깎아내리는 게 *형편없는 은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 — 고린도 교회가 가장 부러워하던, 가장 화려한 은사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그 은사를 들어서, "사랑이 없으면 그게 곧 소음이다"라고 못 박은 겁니다. 제일 좋은 걸 가져다가 0을 곱한 거예요. 0을 곱하면 아무리 큰 숫자도 0이 됩니다.
2절은 더 나아갑니다. 예언하는 능력, 모든 비밀과 지식, 산을 옮길 믿음 — 그 어마어마한 것들을 하나씩 쌓아 올립니다. 능력, 지식, 믿음. 한 청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스펙을 다 모아놓은 셈이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이렇게 못 박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I am nothing.' 내가 영(0)이라는 겁니다. 3절은 한 걸음 더 갑니다. 재산을 다 털어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는 순교까지 가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러분, 보이십니까? 방언 → 예언·지식·믿음 → 구제·순교. 점점 더 높이, 점점 더 거룩해 보이는 쪽으로 계단을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계단마다 똑같은 조건이 붙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사랑이 빠지면 결론은 같습니다. 소음, 0, 무익.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역의 *양*이 아무리 많아도, 그 바닥에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점수가 0이라는 겁니다. 봉사 시간이 사랑이 아닙니다. 직분이 사랑이 아닙니다. 찬양 실력이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얼마나 많이 했느냐*로 신앙을 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닥에 무엇이 흐르느냐*를 보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같은 찬양을 불러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부르면 예배가 됩니다. 옆 사람보다 내 목소리가 돋보이려고 부르면, 똑같은 찬양이 꽹과리가 됩니다. 음정도 같고 가사도 같은데, 바닥에 무엇이 깔렸느냐에 따라 예배가 되기도 하고 소음이 되기도 합니다.
저도 솔직히 고백하면, 사역을 많이 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자주 헷갈렸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카톡 단톡방에서는 "은혜받았어요" 이모티콘을 누르면서, 정작 옆자리 청년의 이름도 모르고 지나간 적 — 인스타엔 예배 사진을 올리고 좋아요는 신경 쓰면서, 마음 한 켠은 시끄럽기만 한 적, 없으십니까?
자기 점검 질문 하나 드립니다. *내 예배의 바닥에 사랑이 흐르고 있는가, 아니면 소리만 요란한가?* 마더 테레사가 평생 자기 마음을 들여다본 그 질문을, 오늘 우리도 한 번 던져 봅시다. 그 질문 자체가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질문이 13장의 출발점이에요.
자,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그 사랑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게 없으면 모든 게 0이 되는 걸까요? 다음 절이 바로 그 답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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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사랑은 공동체를 향해 자기를 내려놓습니다
2158자
그럼 그 사랑이 대체 무엇입니까? 바울은 4절부터 7절에서 사랑을 *행동*으로 정의합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느낌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여러분, 한번 세어 보십시오. 4절부터 7절까지 사랑을 설명하는 동사가 줄줄이 나오는데, 그게 다 *행동*입니다. "사랑은 따뜻한 느낌이다", "사랑은 설레는 감정이다" — 이런 말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참는다, 시기하지 않는다, 자랑하지 않는다, 견딘다. 전부 손과 발로 하는 일이에요.
여러분, 이게 왜 중요합니까? 우리는 사랑을 *기분*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한테 마음이 가면 사랑이고, 마음이 안 가면 사랑이 아니라고 여기죠. 그런데 본문의 사랑은, 마음이 안 가는 사람한테도 *참아주고 견뎌주는* 겁니다. 감정이 식어도 계속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은 의지입니다. 결단입니다.
그리고 이 목록을 가만히 보십시오. 이건 사실 고린도 교회가 *하지 못했던 것들*의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시기했고, 자랑했고, 교만했고, 무례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죄 목록을 그대로 뒤집어서 사랑의 얼굴을 그려준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랑장은 천국 이야기가 아니라 *문제 많은 교회를 향한 거울*이었습니다. "너희에게 지금 없는 게 바로 이거다."
그 한복판에 결정적인 한 구절이 있습니다. 5절.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여러분, 고린도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갈렸습니다. 자기 은사, 자기 유익, 자기 인정 — 모두 '자기'를 향했어요. 그런데 사랑은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자기에게서 *공동체*로 향합니다. 사랑은 '나'에서 출발해 '너'에게 도착하는 운동입니다.
> 제2차 세계대전,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 남부 산골에 르샹봉이라는 작은 개신교 마을이 있었습니다. 어느 겨울밤, 도망쳐 온 한 유대인 여인이 목사관 문을 두드렸을 때, 목사의 아내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습니다. "들어오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 한 번의 환대가 시작이었습니다. 마을 전체는 그 후 4년 동안, 발각되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수천 명의 난민과 부모 잃은 아이들을 집집마다 숨기고 먹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당신들은 어떻게 그런 위험을 무릅썼느냐"는 칭송이 쏟아지자,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어리둥절해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었고, 마침 우리가 거기 있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거대한 사랑은 영웅의 결단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세요" 한 마디, 자기 문을 한 번 연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그게 4년을 *계속*됐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4년입니다. 발각되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어요. 본문 7절이 정확히 이걸 말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한 번 반짝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끝까지 견디는 겁니다. 르샹봉 마을이 보여준 게 바로 그 7절이었습니다.
그리고 6절이 한 가지를 더 짚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여러분, 이 말씀이 왜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우리는 누군가 잘못되면 은근히 통쾌해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톡방에서 누가 실수하면 캡처해서 다른 방으로 옮기고, 잘나가던 친구가 넘어지면 속으로 안도하는 마음.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남이 무너질 때 기뻐하지 않고, 진리가 이길 때 함께 기뻐합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 공동체에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톡방에 처음 들어왔는데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아 조용히 나가버리는 새 친구, 모임 끝나고 인사할 사람이 없어 혼자 빠져나가는 청년. 사랑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1:1 카톡 한 줄 보내는 겁니다. "오늘 와줘서 반가웠어요. 다음에 또 봐요." 르샹봉의 "들어오세요"가, 우리에게는 카톡 한 줄일 수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은, 그렇게 작게 시작됩니다.
자기 점검 질문입니다. *나는 우리 공동체에서 누구의 문을 열어주고 있는가? 아니면 내 문을 꼭 닫은 채,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골라 만나고 있는가?*
여러분, 사랑이 자기를 내려놓고 옆 사람에게로 향한다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혼자만의 결심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사랑이 *모임 속으로* 들어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14장이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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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사랑은 함께 드리는 예배를 세웁니다
2604자
자, 이제 14장으로 넘어옵니다. 13장이 사랑의 정의라면, 14장은 그 사랑이 *모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은사가 다양합니다. 각각 다른 걸 가져옵니다. 바울은 이 다양함을 막지 않아요. 오히려 인정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조건을 못 박습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여러분, 여기 '덕을 세운다'는 말은 원래 건물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집을 짓듯, 공동체를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다는 거예요. 같은 은사라도 두 가지 결과가 나옵니다. 내 은사가 나를 높이는 데 쓰이면 예배는 무너지고, 공동체를 세우는 데 쓰이면 예배는 지어집니다. 같은 찬양, 같은 기도, 같은 봉사라도 방향이 다른 겁니다. 나를 향하면 허무는 일이고, 너를 향하면 짓는 일입니다.
31절은 더 분명합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보이십니까? 예배의 목적은 *한 사람의 무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배우고 세워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나머지는 관객이 됩니다. 그건 예배가 아니라 공연이에요.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세우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예배자가 됩니다.
> 19세기 런던 빈민가는 굶주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점잖은 교회들은 그들에게 전도지와 설교를 건넸지만, 정작 도울 손은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부스가 세운 구세군은 달랐습니다. '수프, 비누, 그리고 구원'을 표어로 내걸고, 굶주린 자에게 먼저 수프를 떠 주고 더러워진 자를 씻긴 뒤에야 복음을 전했습니다. 추운 겨울이면 길모퉁이마다 냄비를 걸었으니, 우리가 거리에서 보는 자선냄비가 바로 그 열린 손의 흔적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입으로 외치는 말이기 전에 손에 들려 주는 따뜻한 그릇입니다. 닫힌 손으로 백 마디 설교하는 것보다, 수프 한 그릇을 떠서 내미는 열린 손 하나가 더 복음다웠던 겁니다. 예배도 그렇습니다. 내가 얼마나 은혜받았느냐, 내 찬양이 얼마나 멋졌느냐가 아니라, 내 옆 사람이 세워졌느냐가 기준입니다. 26절이 그래서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한 거예요. 예배의 성공은 무대 위가 아니라, 객석 한 사람의 마음에서 판가름 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질서를 말합니다. 방언하는 사람은 차례를 따라 하고,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잠잠하라(27-28절). 예언하는 사람도 둘이나 셋이 차례로 하라(29절).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임하면, 먼저 하던 사람이 잠잠하라(30절). 여러분, 30절 이 장면을 그려 보십시오. 내가 한참 말하고 있는데, 옆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내가 멈춰야 합니다. 내 차례가 아직 안 끝났어도, 내 말이 더 중요해 보여도, 멈추는 거예요. 이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내려놓아야 멈춥니다.
바로 그게 핵심입니다. 왜 이런 질서가 필요할까요? 33절이 답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40절,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여기서 오해하지 마십시오. 질서는 은사를 억누르는 규칙이 아닙니다. 질서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내가 잠깐 멈춰서 다른 사람도 말하게 하는 것 — 13장에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했던 그 사랑이, 14장 모임에서는 *내 차례를 양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13장과 14장은 따로 떨어진 본문이 아니에요. 사랑이 모임 속으로 들어오면 질서가 됩니다. 한 사람만 큰 목소리를 내면 소음이 되고, 서로 자리를 내어주면 예배가 됩니다.
그리고 본문 34절부터 35절에는, 당시 고린도 교회의 특정한 무질서 상황을 향한 권면도 나옵니다. 예배 중에 끼어들어 떠들며 모임을 어지럽히던 문제를 다룬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 바울의 관심은 누구의 입을 막는 데 있지 않고, *모임이 서로를 세우는 자리가 되게 하는 데* 있습니다. 34절도 33절의 "화평의 하나님", 40절의 "질서 있게 하라"는 큰 흐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모든 권면이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사랑.*
청년 여러분, 우리 모임을 떠올려 봅시다. 무대 위에서 찬양 인도하는 손만 예배를 세우는 게 아닙니다. 일찍 와서 의자를 정리하는 손, 새 친구 옆에 슬쩍 앉아주는 손, 모임 끝나고 뒷정리하는 손 — 화려하진 않지만 그 손들이 모여 예배가 지어집니다. 인스타에 올라가지 않는 손들이에요. 좋아요도 안 눌리는 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손을 보십니다.
여러분, 단톡방에서 누군가 "요즘 너무 힘들어요"라고 올렸을 때, 그냥 스크롤 넘기지 않고 "기도할게요, 같이 밥 한번 먹어요" 한 줄 답하는 것 — 그게 작아 보입니까? 그게 바로 공동체를 한 장 쌓아 올리는 일입니다. 26절 "덕을 세우는" 일이 거기서 일어나는 겁니다. 거창한 은사가 아니라, 옆 사람을 향한 작은 손길 하나가 예배를 짓습니다.
자기 점검 질문입니다. *내 은사는 나를 드러내는 데 쓰이는가, 우리 공동체를 세우는 데 쓰이는가? 내 신앙 SNS 피드는 화려한데, 내 옆 사람은 나로 인해 세워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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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652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의 모임은 소음입니까, 예배입니까?
방언도, 예언도, 지식도, 산을 옮길 믿음도 — 사랑이 빠지면 시끄러운 꽹과리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은사 아래 사랑이 흐르면, 우리의 모임은 한 장 한 장 세워지는 거룩한 집이 됩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옆 사람의 문을 열어주고, 자기 자리를 내어주며 공동체를 짓습니다. 화려한 은사가 예배를 세우는 게 아닙니다. 옆 사람을 향한 작은 사랑 하나가 예배를 세웁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딱 한 가지만 기억합시다. 내 신앙의 점수는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그 바닥에 사랑이 흐르느냐*로 매겨진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옆 사람에게 보내는 카톡 한 줄, 비워주는 의자 한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Live to Worship, Worship to Live* — 예배하기 위해 살고, 예배함으로 살아가는 우리 청년 공동체. 그 예배의 바닥에, 이번 한 주 사랑이 흐르게 합시다. 화려한 은사보다, 옆 사람을 향한 작은 사랑 한 번이 우리 예배를 세웁니다.
이 결단으로 함께 찬양 드리겠습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 — 사랑으로 주를 섬기며 사는 한평생, 그 고백을 함께 올려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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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제목
144자
주님, 우리의 예배가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화려한 은사보다 옆 사람을 향한 사랑이 먼저 흐르게 하시고, 자기를 내려놓아 공동체를 세우는 청년이 되게 하옵소서. 이번 한 주, 한 사람의 문을 여는 작은 사랑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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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질문
207자
1. 나는 사역의 '양'과 '사랑'을 헷갈린 적이 있습니까? 봉사는 많은데 마음은 시끄러웠던 순간을 나눠 봅시다. (첫째 대지)
2. 우리 공동체에서 내가 '문을 열어줄 수 있는'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번 주 실천할 한 가지를 정해 봅시다. (둘째 대지)
3. 내 은사(재능·시간·자리)는 지금 나를 드러내는 데 쓰입니까, 공동체를 세우는 데 쓰입니까? (셋째 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