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202606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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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왔던 사람 빛으로 나온 사람
목사taejin
예배청년부
본문요한복음3:1-21
날짜2026-06-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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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도입↔서론 / 본문↔본론 / 마무리↔결론 / 결단↔결단찬양 / 기도↔기도제목
섹션별 본문 (12개)
본문 봉독 (요한복음 3:1-21)
1172자
1 그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인사
111자
여러분, 한 주간도 예배자로 사셨습니까? 오늘부터 우리는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이 바뀐 사람들을 한 주에 한 명씩 만나봅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도입
411자
밤이 깊으면 사람은 솔직해집니다. 낮에는 못 하던 검색을 새벽 2시에 합니다. 천장을 보고 누워서, 핸드폰을 켰다 껐다 하면서, 아무에게도 못 보낸 카톡을 썼다 지웠다 합니다.
여러분, 인스타에 올린 피드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거기엔 합격 소식이 있고, 여행 사진이 있고, 웃는 얼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게시물을 올린 손가락이, 새벽 2시에는 "나 지금 괜찮은 건가" 하고 떨립니다. 팔로워는 많은데, 정작 새벽에 전화할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딱 그랬습니다. 그는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밤에" 예수께 왔다고 적습니다(2절). 모든 걸 가진 사람이, 가장 어두운 시간에, 가장 조용히 찾아온 것입니다. 가진 게 사람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던 겁니다.
본문 진입
45자
오늘 우리는 이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배경 해설
512자
니고데모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1절은 그를 "바리새인 중에" 있는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소개합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가장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고, 그중에서도 니고데모는 산헤드린이라는 최고 의회의 의원이었습니다. 오늘로 치면 명문대 교수이면서 동시에 국회의원쯤 되는 사람입니다. 종교로도 1등, 사회적 지위로도 1등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에" 왔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단순히 시간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 복음서 내내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는데, 니고데모의 밤은 그의 영적인 상태이기도 합니다. 아직 빛으로 나오지 못한 상태, 남의 눈이 무서운 상태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은 "랍비여,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었습니다(2절). 그가 인정한 만큼은 진실했습니다. 평생 율법을 가르친 선생이, 자기보다 어린 갈릴리 출신 목수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밤길을 찾아온 것입니다. 무언가 자기 안에 비어 있다는 걸 그는 정직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메시지
105자
오늘 본문은 이 한 사람의 여정입니다. 밤에 몰래 찾아온 사람이, 어떻게 대낮에 빛으로 걸어 나오게 되는가. 그 여정을 세 장면으로 따라가며,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첫째, 채워지지 않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1-2절)
1616자
여러분, 니고데모는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가진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자리가 사람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평생 정답을 아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율법을 물으면 답해주는 사람, 틀린 걸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 앞에 와서 한 말은 질문이 아니라 고백이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압니다." 평생 가르치던 사람이, 처음으로 배우는 자리에 앉은 겁니다.
2절을 더 들여다보십시오. 그는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두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머리로는 인정했습니다. 증거도 충분히 봤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밤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게 있습니다. 표적을 본다고, 증거를 안다고, 사람이 거듭나는 게 아닙니다. 머리로 인정하는 것과 마음이 새로 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변에 예수님에 대해 모르는 청년은 별로 없습니다. 교회를 다닌 시간으로 따지면 십 년, 이십 년 된 사람도 많습니다. 설교도 수백 번 들었고, 성경 구절도 외웁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은 여전히 밤일 수 있습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니고데모의 밤길만큼 먼 거리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카톡 프로필 사진은 환하게 웃고 있고, 상태 메시지엔 "감사"라고 적어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프로필 뒤에 있는 진짜 나는, 새벽에 단톡방 알림을 무음으로 해놓고 혼자 천장을 봅니다. 인스타 피드의 나와, 카톡 1:1 대화창의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위대함은 그 강을 정직하게 인정한 데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종교로, 자기가 쌓은 지식으로, 그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체면을 내려놓고 밤길을 걸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놓치지 마십시오. 니고데모는 가진 게 적어서 예수님께 온 게 아닙니다. 가진 게 많아서, 그 많은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아서 온 겁니다. 우리는 흔히 "성공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겠지", "취업만 하면, 연봉만 오르면 이 허전함이 사라지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그 모든 걸 이미 손에 쥔 사람이었습니다. 정상에 올라가 봤더니, 거기에도 채워지지 않는 밤이 있더라는 겁니다. 가진 것이 답이 아니라는 걸 가장 먼저 아는 사람은, 사실 많이 가져 본 사람입니다.
여러분, 저도 솔직히 고백하면, 남들 앞에서는 다 아는 척하면서도 정작 혼자 있을 때 가장 흔들렸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혹시 SNS에 올린 멋진 나와, 아무도 안 볼 때의 나 사이 그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니고데모처럼, 그 빈자리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첫 걸음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걸 채워졌다고 우기는 사람은, 끝내 예수님께 가지 못합니다.
이번 주, 잠들기 전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딱 한 가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정말 채워져 있는가, 아니면 채워진 척하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 정직해지는 그 순간이, 니고데모가 밤길을 걷던 그 순간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새로 태어나라 하십니다 (3-8절)
2065자
여러분, 니고데모는 무언가 좋은 답을 기대하고 왔을 겁니다. "어떻게 더 잘 살 수 있습니까? 무엇을 더 하면 됩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거듭난다.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본문이 쓴 단어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집니다. 하나는 '다시'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첫 번째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황당해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납니까? 두 번째 어머니 태에 들어갔다 나옵니까?"
여러분, 이 오해가 정확히 핵심을 짚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내가 다시 한 번 노력하는 것"으로 알아들은 겁니다. 한 번 더 잘해보는 것, 결심을 다시 하는 것.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위로부터" 나는 것, 곧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에서 새 생명을 부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합니까? 우리는 늘 "리셋"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되면 다이어리를 새로 사고, 운동을 등록하고, 이번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데 1월 말이 되면 그 다이어리는 책상 서랍에 들어가 있습니다. 왜요? 사람은 자기를 자기 힘으로 새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화면만 새로고침 한다고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운영체제가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5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은 씻음을 가리킵니다. 옛것이 깨끗이 씻겨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새 생명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묵은 것을 씻고, 새것을 채우는 일. 이게 거듭남입니다. 둘 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어서 6절은 이렇게 못 박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여러분, 이 한 절이 무섭습니다. 육에서 나온 건 아무리 다듬어도 육입니다. 내가 아무리 나를 갈고닦아도, 출발점이 나 자신이면 결국 나일 뿐입니다. 영적인 새 사람은, 영이신 성령에게서 나야만 합니다. 자기 계발로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이 있다는 겁니다. 인스타에 올리는 '갓생' 루틴이 아무리 멋져도, 그것으로 영혼이 새로 나지는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9절에서 또 묻습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10절에서 정곡을 찌르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이건 비웃음이 아닙니다. 가장 잘 안다는 사람이, 가장 기본을 놓치고 있었다는 안타까움입니다. 율법을 다 외운 사람이, 정작 '새로 나는 것'은 몰랐습니다. 여러분, 신앙 연차가 길다고 거듭남을 아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새로 난 게 아닙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땅의 일도 안 믿는데 하늘의 일을 어떻게 믿겠느냐" 하십니다. 가장 기초적인 이 거듭남부터, 우리가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8절에서 바람을 예로 드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흥미롭게도 본문에서 '바람'과 '성령'은 같은 한 단어입니다. 바람은 내가 만들 수 없습니다. 내가 명령해서 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분명히 붑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보면 압니다.
거듭남이 그렇습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람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창문을 여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도 한때는 신앙을 '더 열심히 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많이 봉사하고. 그런데 그건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옛 사람이 이를 악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카톡 프로필 상태 메시지만 "새 출발"로 바꿔놓고, 정작 마음은 어제 그대로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프로필을 바꾸라 하지 않으십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라 하십니다.
이번 주, 무언가를 더 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창문을 여십시오. "하나님, 제 힘으로는 안 됩니다. 위에서 새 생명을 부어주십시오." 이 한 마디 기도가, 모든 결심보다 강합니다.
셋째, 들린 십자가를 쳐다보는 믿음입니다 (14-21절)
2043자
여러분, 그러면 거듭남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13절에서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가리키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사람이 위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붙잡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오신 겁니다. 니고데모가 밤길을 걸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사실은 하늘이 먼저 그를 향해 내려와 있었습니다. 거듭남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하늘이 나에게로 내려온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옛날 광야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
이건 출애굽 때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았습니다. 약을 바르는 것도, 뱀을 잡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쳐다보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복음의 핵심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들린 것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장대에 뱀이 들렸듯이, 십자가에 예수님이 들리신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내가 무언가 해내서 얻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쳐다볼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에,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한 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절). 여러분, 거듭남의 출발점은 내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하나님이 먼저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17절은 우리의 오해를 풀어줍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우리를 잡으러 오신 분으로 상상합니다. 잘못을 적발하는 감독관처럼요. 그런데 본문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었습니다. 밤에 숨어 온 니고데모를, 정죄하시려고 만나신 게 아니라, 살리시려고 만나신 겁니다.
18절은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믿음이 심판선을 넘는 유일한 길입니다. 더 잘하는 게 아니라, 들리신 분을 쳐다보고 믿는 것. 그것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한 가지를 더 짚습니다. 19절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이 왔는데, 사람들이 빛을 피합니다. 왜요? 빛 앞에 서면 내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평소엔 깨끗해 보이던 방도, 커튼을 걷고 햇빛 한 줄기가 비스듬히 들어오는 순간, 공기 중에 떠다니던 먼지가 그제야 눈에 보입니다. 먼지는 어제도 거기 있었습니다. 다만 빛이 없어서 안 보였을 뿐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빛이 비치면 내 안의 부끄러운 것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커튼을 칩니다. <!-- illust: 햇빛_들어온_방의_먼지 -->
여러분,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께 다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 아닙니까? 단톡방에서는 신앙 좋은 척, 인스타에서는 은혜받은 척하면서, 정작 1:1 기도의 자리, 빛 앞에 서는 자리는 자꾸 미룹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읽고도 답장 안 하는 카톡처럼 읽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빛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빛 앞에 드러날 내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21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거듭난 사람의 표시는 완벽함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게 있어도 빛으로 걸어 나오는 것, 그것입니다. 먼지가 보이는 게 두려워 커튼을 치는 게 아니라, 청소하려고 일부러 커튼을 걷는 것입니다.
이번 주, 가장 숨기고 싶은 그 한 가지를 들고 빛으로 나오십시오. 거창할 것 없습니다. 잠들기 전 단 1분, 핸드폰을 끄고 "하나님, 이것까지 다 아십니다" 하고 그 자리를 정직하게 펼쳐 놓으십시오. 그게 빛으로 걸어 나오는 첫 걸음입니다.
결론
622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니고데모 이야기에는 놀라운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죄하려 할 때 니고데모가 입을 엽니다. 밤에 숨어 오던 그가, 공회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그리고 19장,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모두가 도망쳤을 때,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백 리트라나 들고 대낮에 나타납니다. 그 무거운 향품을 안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냅니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밤에 몰래 왔던 사람이, 대낮에 두 팔 가득 향품을 안고 빛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만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만남은 사람을 바꿉니다.
여러분 중 누군가는 오늘 밤, 어둠 속에서 이 자리에 와 계실지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니고데모도 밤에 왔습니다. 중요한 건 어디서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걸어가느냐입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새 생명을 구하며, 들린 십자가를 쳐다보며, 빛으로 한 걸음 걸어 나오십시오. Live to Worship, Worship to Live. 예배하기 위해 살고, 예배함으로 살아가는 그 길로 함께 나아갑시다.
오늘 우리의 결단을 담아 「빛 되신 주」를 함께 부르며 마치겠습니다.
기도제목
141자
밤처럼 어두운 마음으로 주께 나아갑니다. 제 힘으로 새로워질 수 없는 저에게, 위로부터 성령의 바람을 불어넣어 주옵소서. 들리신 십자가를 믿음으로 쳐다보게 하시고, 숨기고 싶은 자리까지 빛으로 걸어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눔 질문
251자
1. 니고데모처럼, 겉으로는 채워진 듯하지만 사실은 비어 있는 자리가 내 안에 있다면 어디입니까? SNS 속의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간격을 정직하게 나눠봅시다.
2. "위로부터 나는 것"과 "내가 더 노력하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나는 신앙을 결심과 노력으로만 끌고 가려 한 적은 없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3. 빛 앞에 드러날까 봐 자꾸 미루고 숨기는 한 가지가 있습니까? 이번 주, 그것을 들고 빛으로 한 걸음 나오기 위해 무엇을 해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