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그 인덱스
t-20260621-001
버전 v1

정죄함이 없는 아침

목사taejin
예배새벽
본문로마서 8:1-11
날짜
각 섹션의 ✏️ 수정 버튼을 누르고 지시를 입력하면 해당 섹션만 재생성 → v2 자동 저장. 별칭: 도입↔서론 / 본문↔본론 / 마무리↔결론 / 결단↔결단찬양 / 기도↔기도제목

섹션별 본문 (6개)

서론

571자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이 새벽을 여셨습니까. 어떤 분은 감사로, 또 어떤 분은 무거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펼친 본문, 로마서 8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환한 봉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환한 봉우리 바로 앞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자꾸 악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싶은데, 몸은 자꾸 죄의 법을 따라간다는 탄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탄식이 낯설지 않으실 줄 압니다. 신앙의 길을 오래 걸어오신 분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나는 여전히 부족하구나." 그 마음을 안고 이 새벽에 나오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곤고함의 골짜기 다음, 8장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곤고한 탄식 바로 뒤에, 하나님은 정죄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이 한 문장이 여러분의 아침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

본론1

1066자
먼저 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기 "이제"라는 말에 밑줄을 그으십시오. 어제까지가 아니라, 내일부터가 아니라, "이제"입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그리고 "결코"라는 말이 따라옵니다. 조금 있다는 것이 아니라,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곤고하다고 부르짖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너에게는 정죄가 결코 없다"고 못 박으십니다. 여러분, 한 수도사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오백 년 전, 마르틴 루터라는 한 젊은 수도사가 작은 탑 방에서 밤마다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루에 일곱 번 기도하고, 단식하고, 자기 몸을 매로 때렸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에 평안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인데,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살아남는가." 그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자기를 벌하는 칼처럼 느껴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밤, 그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내가 쌓아 올려야 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입혀 주시는 의라는 것을. 자기를 정죄하던 칼이 사실은 자기를 덮어 주는 옷이었음을 본 그 순간, 정죄받던 방이 그에게는 낙원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선언이 가능합니까. 3절이 답을 줍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내 얼굴의 더러운 것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씻어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도 그렇습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해 주지만, 그 죄를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정죄를 그 아들의 몸에 정하셨습니다. 내가 받을 판결을 그분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에게는 정죄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새벽에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으로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까. 지나간 실수입니까, 어제의 부족함입니까. 하나님이 "정죄가 없다" 하시는데, 내가 나를 다시 정죄의 법정에 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아침, 그 무거운 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

본론2

843자
정죄가 없다는 선언 다음에, 바울은 우리에게 두 갈래 길을 보여줍니다. 5절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여기 "육신"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우리 몸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육신"은 하나님 없이 나 혼자 충분하다고 여기는 마음, 곧 내 힘과 내 노력만 의지하는 자리를 가리킵니다. 7장에서 곤고하게 만들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래서 6절이 두 길의 끝을 보여줍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내 힘만 붙들고 사는 생각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르는 생각의 끝은 생명이고, 평안입니다. 여러분, 평안이라는 이 단어가 얼마나 귀합니까. 우리가 새벽마다 구하는 것이 바로 이 평안 아닙니까. 자녀 걱정, 건강 염려, 내일에 대한 불안을 안고 나온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 평안이 "영의 생각"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7절과 8절은 조금 무겁게 들립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께 굴복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표면만 보면 절망스럽습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바로 이 절망이 복된 소식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고백이, 성령을 의지하는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새벽 스스로를 점검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어느 생각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나 혼자 짊어지려는 생각입니까, 아니면 성령께 맡기는 생각입니까. 더 노력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무거운 짐을 혼자 끌지 말고, 함께하시는 성령께 기대어 이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

본론3

761자
이제 본문은 가장 환한 자리로 올라갑니다. 9절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여기 "거하신다"는 말은 잠깐 들렀다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집을 짓고 머무신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손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이 이 작은 나를 집으로 삼으시고 머무신다는 것입니다. 10절이 그 결과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우리 몸은 여전히 늙고 약해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 약해지는 몸 안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의 속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 11절이 가장 큰 약속을 펼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러분, 이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신 그 부활의 능력이, 지금 내 안에 거하시는 바로 그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언젠가 우리의 죽을 몸까지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무덤이 끝이 아닙니다. 노년의 약함도 끝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부활을 일으키시는 영이 사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새벽 이렇게 자신에게 말해 보십시오. "내 안에 부활의 영이 사신다." 거울 앞에 선 내 얼굴이 어제보다 늙었어도, 그 몸 안에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

결론

324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한 마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에게는 정죄가 없고, 내 안에는 부활의 영이 사신다는 것입니다. 곤고함의 골짜기에서 시작해, 정죄 없음의 선언을 지나, 부활의 약속까지 올라온 이 아침입니다. 무겁게 들고 오신 짐이 있다면 이 자리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오늘 집을 나서기 전, 한 구절만 소리 내어 읽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가 없는 그 자유와, 내 안에 사시는 부활의 영의 능력이, 오늘 이 하루 여러분과 함께 걸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제목

239자
하나님 아버지, 곤고하다 부르짖던 우리에게 정죄가 없다 선언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무거운 짐을 혼자 끌지 않게 하옵소서. 내 힘만 붙드는 자리에서 돌이켜, 생명과 평안을 주시는 그 영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약해지는 이 몸 안에도 부활의 소망을 품고 이 하루를 걷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결단찬송: [415장] 십자가 그늘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