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2026062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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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는 손
목사taejin
예배청년부
본문시편113:1-9
날짜2026-06-2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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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도입↔서론 / 본문↔본론 / 마무리↔결론 / 결단↔결단찬양 / 기도↔기도제목
섹션별 본문 (9개)
본문: 시편 113:1-9
344자
> **본문 봉독 (시 113:1-9)**
>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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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433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한 주간도 예배자로 살아오셨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두 개의 자리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하나는 하늘보다 더 높은 자리입니다. 또 하나는 먼지 더미, 거름 더미라는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은 그 두 자리를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이어 붙입니다. 하늘보다 높이 앉으신 분이, 먼지 더미에 주저앉은 사람을 굽어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 한 장면을 노래합니다.
여러분도 마음 한구석에 그런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화면을 들여다볼수록 나만 바닥에 있는 것 같은 자리. 스펙을 쌓고 또 쌓아도 늘 누군가보다 한 칸 아래인 것 같은 자리.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나라는 사람이 먼지처럼 작게 느껴지는 자리 말입니다. 오늘 시편 113편은 바로 그 먼지 더미를 향해 굽어보시는 한 손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배경 해설
844자
이 노래를 제대로 읽으려면 시편 113편이 어떤 노래였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113편은 첫 마디도 "할렐루야", 마지막 마디도 "할렐루야"로 봉인된 순수한 찬양 시입니다. 할렐루야는 곧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입니다. 처음과 끝을 같은 외침으로 묶어, 이 노래 전체가 찬양 하나로 가득 차 있다는 뜻입니다.
이 시편에는 한 가지 더 알아 둘 배경이 있습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같은 큰 절기에 이 113편에서 118편까지를 묶어 불렀습니다. 노예 되었던 자기들을 하나님이 건져 내신 그 구원을 기억하며 부르던 노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노래는 책상 앞의 묵상이 아니라, 밑바닥에서 건짐받아 본 사람들이 터뜨리는 감격의 찬송이었습니다.
여기서 시편을 어떻게 읽을지 한 가지 나누겠습니다. 시편은 교리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설명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그대로 쏟아 놓은 기도이자 노래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멀찍이 서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나를 세워 놓고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 큐티를 이렇게 해 보십시오. 첫째, 본문에서 마음에 닿는 한 절을 골라, 소리 내어 그 절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둘째, 오늘 내가 가장 작게 느껴지는 그 자리를 떠올리고, 그 자리에 7절의 "먼지 더미"라는 말을 한번 겹쳐 읽어 보십시오.
그렇다면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가,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높으신 분이 어디까지 낮아져 누구를 보시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세 가지로 함께 나누겠습니다. 첫째, 영원히 찬양받으실 이름. 둘째, 비길 데 없이 높으신 분. 셋째, 먼지 더미로 굽어보시는 손.
첫째, 영원히 찬양받으실 이름 (1-3절)
1641자
먼저 이 노래가 무엇으로 시작하는지 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 노래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찬양하라." 그리고 그 명령을 받는 대상이 "여호와의 종들"입니다.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잘난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종들, 곧 평범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찬양은 특별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둔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보십시오. 이 종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명령이 바로 "찬양하라"입니다. 일하라도 아니고, 성공하라도 아니고, 찬양하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본질적인 일은 무엇을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를 때 쓰는 이름, "예배자"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예배자란 화려한 무엇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든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엇이 되었느냐"를 묻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찬양하는 종"으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무엇을 찬양하라고 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됨 전체를 담습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전부를 높이라는 것입니다.
이 찬양에는 끝이 없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찬양에 시간의 끝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까지입니다. 그리고 3절은 그 범위를 한 번 더 넓힙니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이번에는 공간의 끝이 없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 끝에서 해가 지는 서쪽 끝까지, 온 세상 어디에도 그 찬양이 닿지 않는 자리가 없습니다.
이 두 절을 가만히 겹쳐 보십시오. 영원까지라는 시간과 온 세상이라는 공간을 다 채우는 찬양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작은 자리, 내 좁은 방, 내 평범한 하루도 그 광대한 찬양의 공간 바깥이 아닙니다. 나는 너무 작아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구석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그 이름이 높임받는 그 거대한 자리 한가운데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가 선 그 자리까지 가득 채우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붙들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내 기분과 내 형편을 따라 켜졌다 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으로도 끝이 없고 공간으로도 끝이 없는 그분이라면, 내 상황이 어떠하든 그분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일이 잘 풀릴 때만 찬양하고, 힘들면 입을 닫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정반대를 말합니다.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찬양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하루는 보통 비교로 시작해서 비교로 끝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나보다 앞선 사람을 확인하며 내 자리를 가늠합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그 하루를 다른 것으로 채우라고 합니다.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비교가 아니라 찬양으로 말입니다. 비교는 나를 자꾸 끌어내리지만, 찬양은 내 시선을 나보다 높으신 분께로 끌어올립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찬양이 필요합니다.
둘째, 비길 데 없이 높으신 분 (4-6절)
2311자
그러면 우리가 찬양할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이 노래가 불리던 때, 작은 이스라엘 주변에는 거대한 제국들이 둘러서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그 큰 나라들 앞에서 먼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모든 나라보다 하나님이 높으시다고 선포합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도, 어떤 제국도 그분 위에 있지 못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사 40:15). 우리를 짓누르는 듯한 세상의 힘도, 하나님 앞에서는 저울 위의 티끌 한 점이라는 것입니다.
5절은 그 높으심을 질문 하나로 못 박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이것은 답을 듣자고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다는 대답을 이미 품은 질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높은 이도 없고, 하나님만큼 높은 이도 없습니다. 그분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분이십니다.
여기서 잠깐 멈춰 보십시오. 우리는 늘 누군가와 나란히 줄을 세워 비교합니다. 나보다 위, 나보다 아래를 끊임없이 가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떤 줄에도 세울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이 우리를 비교에서 풀어 줍니다.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신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라면, 내 가치는 더 이상 옆 사람과의 거리로 매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때는 유난히 비교가 많은 시절입니다. 같은 출발선에 섰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어느새 저만치 앞서 있는 것 같고, 화면을 열 때마다 나만 한 박자 뒤처진 듯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그 비교의 줄은 본래 끝이 없어서, 한 칸을 올라서면 또 위가 보이고, 아무리 애써도 마지막 칸에는 도착하지 못합니다. 본문은 그 끝없는 줄에서 우리를 한 칸 위로 올려 주는 것이 아니라, 줄 밖으로 아예 꺼내 줍니다.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높으신 분이 나를 자기 사람으로 부르셨다면, 나는 더 이상 그 줄 위에서 내 자리를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그 한 가지가 이미 내 자리를 정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우러러보며 따라가는 것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더 좋은 스펙,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인정. 우리는 그것들을 올려다보며 그 아래에서 숨이 찹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러러보던 것들 가운데, 나를 내려다보며 굽어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스펙은 나를 살피지 않습니다. 세상의 자리는 나를 일으켜 주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높아 보이지만 나를 향해 몸을 굽히지 않습니다. 오직 한 분, 정말로 비길 데 없이 높으신 하나님만이, 나를 향해 굽어보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높으신 분에 대해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6절입니다.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하늘보다 높으신 분이, 스스로 몸을 굽히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낮추십니다. 그 높은 보좌에서 까마득히 내려다보시는 정도가 아니라, 친히 허리를 굽혀 땅의 형편을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살피시고"라는 말을 가볍게 넘기지 마십시오. 그저 한눈에 쓱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굽혀 자세히 들여다보신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하늘만이 아니라 "천지", 곧 땅의 가장 낮은 구석까지 살피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느낍니다. 화려한 사람은 다들 알아봐 주지만, 평범하고 초라한 나는 아무도 제대로 보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자세히 보시는 것이, 바로 그 낮은 자리에 있는 나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느끼는 그 자리를, 하나님은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점입니다. 세상의 높은 자리는 보통 사람을 멀어지게 합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낮은 자리가 안 보이고, 낮은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높으심은 정반대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데를 가장 잘 보십니다. 높으심과 인자하심이 한 분 안에 있다는 것, 이것이 다른 어떤 신과도 같지 않은 우리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 4절의 높으심과 6절의 낮추심을 떼어 놓고 읽으면 안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높기만 하시다면, 그분은 우리와 너무 멀어 두려운 분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낮은 데만 보시고 높지 않으시다면, 그분은 우리를 일으킬 힘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하늘보다 높으셔서 우리를 일으킬 능력이 있으시고, 동시에 먼지 더미까지 굽어보셔서 우리를 일으킬 마음이 있으십니다. 능력과 마음, 그 둘을 다 가지신 분,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먼지 더미로 굽어보시는 손 (7-9절)
2928자
그러면 그 굽어보시는 손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무엇을 하시는지 보겠습니다. 7절과 8절입니다.
>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여기 "먼지 더미"와 "거름 더미"는 그저 비유가 아닙니다. 그 시절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실제로 머물던 자리입니다. 성 밖에 버려진 잿더미,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끼니를 잇던 자리,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자리입니다. 본문은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손이 닿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곳이 다름 아닌 그런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손이 무엇을 하십니까. 거기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키시며", "들어 세워", "지도자들과 함께" 앉히십니다. 먼지 더미에서 끌어올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들과 나란히 앉을 자리까지 올리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의 완전한 반전입니다.
이것은 이미 한 여인의 노래에서 똑같이 울려 퍼졌던 진리입니다. 오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해 멸시받던 한나가, 마침내 사무엘을 품에 안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 2:8). 본문 7절과 8절이 한나의 입에서 먼저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한나는 그것을 머리로 안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으로 겪고 부른 것입니다. 멸시받던 그 자리에서 직접 일으킴을 받아 본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신약에서 또 한 여인의 입을 통해 다시 울립니다. 천한 시골 처녀 마리아가 메시아의 어머니로 부름받았을 때, 그녀도 같은 진리를 노래합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52-53). 한나도, 마리아도, 그리고 시편 113편의 시인도, 모두 같은 한 분을 노래합니다. 높은 것을 낮추시고 낮은 것을 높이시는 하나님, 그 반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9절은 바로 그 한나 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그 시대에 아이를 갖지 못한 여인은 집 안에서도 설 자리가 없는, 가장 마음 아픈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여인을 "집에 살게" 하시고, 웃음이 끊겼던 자리를 자녀들의 기쁨으로 채우십니다. 가장 비어 있던 손을 가장 충만하게 채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7절에서 9절까지가 한결같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세상이 끝났다고 손을 놓은 그 자리, 아무도 다시 보지 않는 그 자리를 친히 보시고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높은 자리를 우러러보지만, 하나님은 낮은 자리로 굽어보십니다. 세상은 채워진 손을 부러워하지만, 하나님은 비어 있는 손을 채우십니다.
그렇다면 이 높으심과 낮추심이 가장 환하게 드러난 자리가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하늘보다 높으신 분이 친히 먼지 더미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시편 113편이 "스스로 낮추사" 한 마디로 노래한 그 일을, 예수님은 십자가까지 내려가는 걸음으로 다 이루셨습니다.
한 가지 더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은 마지막 만찬을 마친 뒤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셨습니다(마 26:30). 유월절에 부르던 그 찬미가가 바로 이 시편 113편에서 118편까지였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신 그날 밤, 예수님의 입술에 이 113편의 노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낮은 데로 내려가시기 직전, 그분은 가장 낮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친히 찬양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손이 되어, 먼지 더미에 있던 우리를 들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여러분, 이 자리가 어디인지 분명히 보십시오. 본문에서 일으킴받은 가난한 자가 앉은 자리는 "지도자들과 함께"였습니다. 한나가 노래한 자리는 "귀족들과 함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우리가 앉게 된 자리는 그보다 더 높습니다. 그저 높은 사람들 곁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의 자녀가 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목말라하는 인정,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받아 준다는 그 인정을, 가장 높으신 분이 친히 자녀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서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려 합니다. 스펙으로, 성과로,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내 가치를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쌓아 올린 정체성은 한 번 무너지면 함께 무너집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비교에서 밀리면, 인정받지 못하면, 나라는 사람이 통째로 흔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자녀 됨은 다릅니다. 그것은 내가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먼지 더미로 굽어보신 그 손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니, 내 형편이 흔들려도 그 이름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청년 여러분, 그러니 오늘 내가 어느 자리에 있다고 느끼는지 한번 솔직히 들여다보십시오. 남들과 비교하며 나는 먼지 같다고 느끼는 그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거름 더미 같다고 느끼는 그 자리. 본문은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의 손이 가장 가까이 와 있는 자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 자리를 부끄러워하며 숨기지 마십시오. 그 자리야말로 일으켜 세우시는 손이 닿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먼지 더미에 앉은 나를 보시고 일으키십니다.** 이번 한 주, 나를 끌어내리는 비교의 줄에서 한 발 물러나, 그 손이 이미 나를 잡고 계신다는 것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결론
936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늘보다 높은 자리와 먼지 더미라는 가장 낮은 자리를 함께 보았습니다. 이제 이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고 마칩시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가장 낮은 나를 굽어보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분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높으신 분이지만, 바로 그 높은 자리에서 스스로 몸을 굽혀 먼지 더미의 나를 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그 먼지 더미까지 내려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리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오늘 본문 113편은 첫 마디도 할렐루야, 마지막 마디도 할렐루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 찬양이 왜 처음부터 끝까지 끊이지 않는지를 압니다. 그 사이에 6절과 7절, 곧 높으신 분이 스스로 낮추사 먼지 더미의 나를 일으키셨다는 그 한 가지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찬양은 형편이 좋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손을 본 사람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첫째, 내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찬양의 이유임을 기억하고, 이번 한 주 비교로 채우던 하루를 찬양으로 채워 보십시오. 둘째,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신 분이 나의 주인이시니, 내 가치를 더 이상 옆 사람과의 거리로 매기지 마십시오. 셋째, 내가 가장 작게 느껴지는 그 먼지 더미 같은 자리야말로 일으키시는 손이 닿는 자리임을 믿고, 그 자리를 숨기지 말고 그분 앞에 그대로 내어놓으십시오.
먼지 더미에서 우리를 일으키시려 친히 십자가까지 내려오신 그 손에, 오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우리 청년 공동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일어나,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찬양하며 그 은혜의 손에 우리를 맡기는 결단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먼지 더미 같던 나를 일으켜 세우신 그 손, 그것이 오늘 본문의 찬양입니다. 할렐루야.
기도제목
172자
1. 내 형편과 상관없이, 높으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고 찬양으로 하루를 채우게 하소서.
2. 비교의 줄에서 내려와, 비길 데 없이 높으신 주님 안에서 내 참된 가치를 발견하게 하소서.
3. 가장 작게 느껴지는 그 자리를 숨기지 않고, 먼지 더미를 일으키시는 그 손 앞에 그대로 내어놓게 하소서.
나눔 질문
258자
1. (1대지) 요즘 나의 하루는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습니까? 찬양보다 비교가 앞섰던 순간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2. (2대지)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리요"(5절).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신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믿는다면, 지금 나를 짓누르는 비교 가운데 가장 내려놓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3. (3대지) 지금 내가 "먼지 더미" 같다고 느끼는 자리가 있습니까? 그 자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손이 가까이 와 있는 자리라는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들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