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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2026070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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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도 내 것이라 하시는 하나님

목사taejin
예배청년부
본문에스겔25:1-11
날짜2026-07-05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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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별 본문 (9개)

본문: 에스겔 25:1-11

806자
> **본문 봉독 (겔 25:1-11)** >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네 얼굴을 암몬 족속에게 돌리고 그들에게 예언하라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 성소가 더럽힘을 받을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폐할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에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동방 사람에게 기업으로 넘겨 주리니 그들이 네 가운데에 진을 치며 네 가운데에 그 거처를 베풀며 네 열매를 먹으며 네 젖을 마실지라 내가 랍바를 낙타의 우리로 만들며 암몬 족속의 땅을 양 떼가 눕는 곳으로 삼은즉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하며 즐거워하였나니 그런즉 내가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다른 민족에게 넘겨 주어 노략을 당하게 하며 너를 만민 중에서 끊어 버리며 너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패망하게 하여 멸하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모압의 한편 곧 그 나라 국경에 있는 영화로운 성읍들 벧여시못과 바알므온과 기랴다임을 열고 암몬 족속과 더불어 동방 사람에게 넘겨 주어 기업을 삼게 할 것이라 암몬 족속이 다시는 이방 가운데에서 기억되지 아니하게 하려니와 내가 모압에 벌을 내리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

서론

548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한 주간도 예배자로 살아오셨습니까. 살다 보면 이런 순간이 옵니다. 내가 무너져 있을 때, 그것을 보고 누군가 속으로 웃는 것 같은 순간 말입니다. 시험에 떨어졌을 때, 준비하던 일이 어그러졌을 때, 남들 앞에서 초라해졌을 때,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거봐, 너도 별거 아니네." 그 소리 앞에서 우리는 작아집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곧 내가 누구인지를 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그렇게 무너진 백성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가 무너졌습니다. 성전이 불타고, 땅이 황폐해지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이웃 나라들이 그 무너짐을 보고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본문에 적혀 있습니다. 한쪽은 손뼉을 치며 "아하 좋다" 했고, 한쪽은 "유다도 별거 없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무너진 백성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비웃은 나라들을 향해 입을 여십니다. 오늘 본문은, 무너진 자리에서 세상의 비웃음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배경 해설

1153자
이 본문을 제대로 읽으려면 에스겔서가 어떤 책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에스겔은 약 2,600년 전, 나라가 망해 바벨론이라는 먼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입니다. 그는 원래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제사장이었는데, 성전 근처에도 못 가는 강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부르셔서, 무너져 절망한 포로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는 앞부분에서는 "너희 죄 때문에 예루살렘이 반드시 무너진다"고 선포하고, 무너진 다음에는 "그래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고 선포하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 25장은 그 책의 흐름이 바뀌는 자리에 있습니다. 24장까지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유다를 향해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25장부터는 방향이 바뀌어, 유다를 둘러싼 이방 나라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암몬과 모압이 그 첫 번째입니다. 이 나라들은 유다가 무너질 때 곁에서 그것을 지켜본 이웃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두 나라는 아무 상관없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암몬과 모압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창 19:36-38). 곧 이스라엘과 피가 섞인 친척이었습니다. 형제가 무너지면 함께 아파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들은 정반대로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심판 본문을 읽을 때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들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힘이 약해서, 혹은 전쟁에 져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대했느냐, 바로 그것을 물으십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 큐티를 이렇게 해 보십시오. 첫째, 본문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은 무너진 자기 백성을 어떻게 여기시는가"를 한 줄로 적어 보십시오. 둘째, 내가 요즘 누군가의 무너짐 앞에서 어떤 마음이었는지 솔직하게 떠올려 보십시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이것입니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내 것"이라 하시고,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며 친히 나서신다.** 이 한 가지를 세 가지로 함께 나누겠습니다. 첫째, 무너져도 여전히 "내 성소, 내 백성"이라 하십니다. 둘째, 비웃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친히 나서십니다. 셋째, "별거 아니다"라는 세상의 평가를 하나님이 뒤집으십니다.

첫째, 무너져도 여전히 "내 성소, 내 백성"이라 하십니다 (25:1-3)

1736자
먼저 하나님이 암몬을 향해 무엇을 지적하시는지 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 "내 성소가 더럽힘을 받을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폐할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에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암몬의 죄가 무엇입니까. 유다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아하 좋다"라고 한 것입니다. "아하 좋다"는 남의 불행을 보며 손뼉 치는 소리입니다. 성전이 불탈 때, 땅이 황폐해질 때, 사람들이 사슬에 묶여 끌려갈 때, 그 참혹한 장면을 보면서 고소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너진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시는지 들어 보십시오. "내 성소"입니다. "이스라엘 땅"입니다. "유다 족속"입니다. 성전은 이미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것을 "내 성소"라고 부르십니다. 땅은 황폐해졌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땅이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무너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잿더미가 되었어도, 사슬에 묶였어도, 여전히 "내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암몬은 그냥 한 약한 나라의 몰락을 비웃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것"이라 부르시는 것을 비웃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조롱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암몬은 남도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롯의 후손, 곧 이스라엘의 형제였습니다. 형제가 매를 맞고 쓰러졌을 때 달려가 일으켜야 할 사람이, 도리어 손뼉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그 손뼉 소리를 그냥 흘려듣지 않으셨습니다. 무너진 백성이 그 조롱을 어떻게 들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포로로 끌려간 이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모든 것을 잃고 강가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데, 곁에서는 손뼉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너진 것도 서러운데, 그 무너짐을 즐거워하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는 백성이 스스로를 변호할 힘조차 없을 때, 하나님이 그 손뼉 소리에 친히 응답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에스겔서 전체가 증언합니다. 에스겔이 부름받은 곳이 어디였습니까.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나라가 망해 끌려간 바벨론의 강가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자리, 아무도 희망을 보지 못하는 그 자리로 찾아오셔서 하늘을 여셨습니다. 무너진 자리를 하나님의 부재로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무너진 자리에 찾아오셔서, 무너진 백성을 여전히 "내 것"이라 부르시는 분입니다. 청년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위로입니다. 여러분이 무너져 있을 때, 세상은 그 무너짐만 보고 "아하, 너도 별거 아니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너진 그 모습을 보시면서도 여전히 여러분을 "내 것"이라 부르십니다. 내가 실패했다고 해서, 초라해졌다고 해서,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사실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결과를 보고 값을 매기지만, 하나님은 소유를 보고 붙드십니다. 시험 성적표가 나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남들의 시선이 나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무너진 순간에도 여전히 나를 "내 것"이라 부르시는 그 한 분의 음성이 나를 정의합니다. **잿더미가 되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여전히 "내 성소"라 부르십니다.** 이것이 첫째 말씀입니다.

둘째, 비웃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친히 나서십니다 (25:4-7)

1826자
이제 하나님이 그 비웃음에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보겠습니다. 6절과 7절입니다. > "네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하며 즐거워하였나니 그런즉 내가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다른 민족에게 넘겨 주어 노략을 당하게 하며" 6절은 암몬의 죄를 다시 한번 정확히 짚습니다.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하며 즐거워하였나니." 그냥 스쳐 지나가며 한 번 비웃은 것이 아닙니다.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고, 마음을 다해 멸시했습니다. 온 힘을 다해 남의 무너짐을 즐긴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내가 손을 네 위에 펴서." 여기서 나서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군대가 아닙니다. 어떤 강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내가" 나서겠다고 하십니다. 무너진 백성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힘이 없다고 해서 아무도 그들 편이 아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편이 되어 손을 펴셨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펴시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4절과 5절이 그 장면을 그립니다. 하나님은 암몬을 "동방 사람", 곧 사막에서 온 유목민들에게 넘기시고, 그들의 자랑이던 수도 랍바를 "낙타의 우리"로, 암몬 땅을 "양 떼가 눕는 곳"으로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도성이 짐승이 누워 쉬는 빈 들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남의 무너짐을 보고 손뼉 치던 그 나라가, 이제 스스로 텅 빈 초원이 됩니다. 남이 무너지는 것을 즐긴 손이, 정작 자기 성이 무너지는 것은 막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나서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5절 끝과 7절 끝에 똑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 한 문장은 에스겔서 전체에 일흔 번 넘게 반복되는, 이 책의 심장 같은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유가 단순히 분풀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서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참으로 누구신지를 온 세상이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무너진 백성을 비웃던 자들이, 결국 그 백성 뒤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머리로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겪어서 아는 것입니다. 손뼉 치던 자들은 하나님을 멀리 있는 이름으로만 알았지만, 하나님이 친히 손을 펴시는 그날,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자기 백성을 끝내 지키시는 분임을 온몸으로 알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억울함을 갚는 일은 우리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손뼉 친 자에게 똑같이 손뼉 쳐 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친히 손을 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청년 여러분, 그러니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누군가 나의 무너짐을 즐기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가 할 일은 그 사람과 똑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갈며 복수를 계획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편이 되어 손을 펴시는 하나님께 그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 억울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께서 저의 편이 되어 주십시오." 이렇게 맡길 때, 우리는 미움에 삼켜지지 않습니다. 복수는 나를 상대와 똑같은 자리로 끌어내립니다. 손뼉 친 자에게 손뼉으로 갚으려는 순간, 나도 남의 무너짐을 즐기는 그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그 자리로 내려가지 않아도 됩니다. **힘없는 나를 위해 친히 손을 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는 복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둘째 말씀입니다.

셋째, "별거 아니다"라는 세상의 평가를 하나님이 뒤집으십니다 (25:8-11)

2294자
이제 두 번째 나라, 모압으로 넘어갑니다. 8절을 보십시오. >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하도다" 모압의 죄는 암몬과 조금 다릅니다. 모압은 손뼉을 치며 "아하 좋다"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무슨 말입니까. "유다도 별거 아니네. 하나님의 백성이라더니, 다른 나라들처럼 똑같이 망하지 않느냐"라는 말입니다. 손뼉을 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깎아내린 것입니다. 이것이 왜 큰 죄입니까. 모압은 단지 유다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도 별거 아니다"라는 말은, "유다의 하나님도 별거 아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내 백성"이라 부르신 그들을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함부로 평가하는 무례함은, 곧 하나님을 향한 공격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압을 향해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압이 자랑하던 국경의 "영화로운 성읍들 벧여시못과 바알므온과 기랴다임"을 "열겠다"고 하십니다. "연다"는 것은, 굳게 닫아 걸고 지키던 성문을 적 앞에 활짝 노출시키신다는 뜻입니다. 가장 자랑스럽던 성, 가장 튼튼하다고 믿던 그 성문이 도리어 가장 먼저 열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별거 아니다"라고 저울질하던 그 입술이, 정작 자기 성이 열리는 것은 막지 못했습니다. 남을 함부로 평가하던 자리가, 자기 자신이 가장 취약해지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평가를 어떻게 뒤집으시는지 보십시오. 10절입니다. 하나님은 모압을 심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암몬 족속이 다시는 이방 가운데에서 기억되지 아니하게 하려니와."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유다도 별거 아니네, 곧 잊힐 나라네"라고 말하던 그 나라들이, 도리어 역사에서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다를 "별거 아니다"라고 깎아내린 암몬과 모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조롱하던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까지 남아, 우리가 이 자리에서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반전을 만들었습니까.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가 진짜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무너짐을 보고 "별거 아니다"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것은 내 것이다"라고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옳은 것으로 드러나는 판단은, 세상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이 진리가 십자가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세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별거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남을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마 27:42) 하며 조롱했습니다. 세상의 눈에 십자가의 그분은 무너진 자, 실패한 자, 아무것도 아닌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정반대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세상이 "별거 아니다"라며 버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온 세상이 무릎 꿇을 이름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빌 2:11). 에스겔이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선포한 그 약속이, 결국 온 세상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리에서 완성됩니다. 그 마지막 날, 세상의 저울은 완전히 뒤집힐 것입니다. "별거 아니다"라며 큰소리치던 것들은 암몬과 모압처럼 기억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이 "내 것"이라 붙드신 자들은 그리스도 앞에 당당히 서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세상이 나를 어떻게 저울질하든, 마지막에 나를 세워 주실 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은 오늘의 평가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청년 여러분, 그러니 세상의 평가표를 여러분의 정체로 삼지 마십시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저울에 올려놓고 값을 매깁니다. 스펙으로, 성적으로, 통장의 숫자로, 남들과 나란히 세워 놓고 "너는 이 정도"라고 매깁니다. 다른 사람의 화면 속 삶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 "나는 별거 아니다"라고 결론 내릴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저울은 진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별거 아니다"라던 세상의 저울이 틀렸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의 값은 세상이 매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 것"이라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세상이 "별거 아니다" 하여도, 하나님이 "내 것이라" 하시면 그것이 진짜입니다.** 이것이 셋째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788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너진 백성을 곁에서 비웃던 나라들의 이야기에서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서 세 가지를 삶으로 붙들고 마칩시다. 첫째, 무너진 나를 하나님이 여전히 "내 것"이라 부르심을 기억하십시오. 이번 한 주, 실패하고 초라해진 순간이 오거든, 세상의 "아하 좋다" 소리 대신 하나님의 "너는 내 것이라" 하시는 음성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잿더미가 된 성전도 "내 성소"라 부르시는 분입니다. 둘째,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나의 무너짐을 즐기는 사람이 있거든, 똑같이 갚으려 애쓰지 마십시오. 우리 편이 되어 친히 손을 펴시는 하나님께 그 일을 올려 드리고, 미움에 삼켜지지 않는 한 주가 되십시오. 셋째, 세상의 저울에서 내려오십시오. 남과 비교하며 "나는 별거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던 마음을 오늘 내려놓으십시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신 하나님이, 여러분도 그 피로 값 주고 사신 "내 것"이라 부르십니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내 것"이라 하시고,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며 친히 나서십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나를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누구라 부르시느냐가 나를 정합니다. 오늘 이 진리를 가슴에 안고,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위에 서는 우리 청년 공동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일어나, "주 안에 있는 나에게"를 찬양하며, 무너져도 나를 "내 것"이라 부르시는 그 주님 앞에 우리의 정체를 다시 세우는 결단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기도제목

160자
1. 무너지고 초라해진 순간에도 나를 "내 것"이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붙들게 하소서. 2. 나의 억울함을 스스로 갚으려 하지 않고, 친히 손을 펴시는 하나님께 맡기게 하소서. 3. 세상의 저울에 나를 올려놓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평가 위에 서게 하소서.

나눔 질문

337자
1. (1대지) 최근 내가 무너지거나 초라해졌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습니까? 그때 세상의 "아하 좋다" 같은 소리가 들렸다면, 하나님이 나를 "내 것"이라 부르신다는 사실은 그 순간을 어떻게 다시 보게 합니까? 2. (2대지) 나의 무너짐을 즐기거나 나를 억울하게 한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손을 네 위에 펴서"라고 친히 나서시는 하나님께 그 일을 맡긴다는 것은, 이번 한 주 내 마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이겠습니까? 3. (3대지) 나는 요즘 무엇으로 나의 값을 매기고 있습니까? 세상의 저울과, 나를 "내 것"이라 하시는 하나님의 평가 중에서 무엇을 나의 정체로 붙들고 살고 있는지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