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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도입↔서론 / 본문↔본론 / 마무리↔결론 / 결단↔결단찬양 / 기도↔기도제목
섹션별 본문 (8개)
본문: 에스겔 29:1-16
1193자
> **본문 봉독 (겔 29:1-16)**
> 열째 해 열째 달 열두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과 온 애굽으로 얼굴을 향하고 예언하라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의 강의 고기가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너의 강들 가운데에서 끌어내고 너와 너의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지리니 네가 지면에 떨어지고 다시는 거두거나 모으지 못할 것은 내가 너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로 주었음이라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칼이 네게 임하게 하여 네게서 사람과 짐승을 끊은즉 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와 네 강들을 쳐서 애굽 땅 믹돌에서부터 수에네 곧 구스 지경까지 황폐한 황무지 곧 사막이 되게 하리니 그 가운데로 사람의 발도 지나가지 아니하며 짐승의 발도 지나가지 아니하고 거주하는 사람이 없이 사십 년이 지날지라 내가 애굽 땅을 황폐한 나라들 같이 황폐하게 하며 애굽 성읍도 사막이 된 나라들의 성읍 같이 사십 년 동안 황폐하게 하고 애굽 사람들은 각국 가운데로 흩으며 여러 민족 가운데로 헤치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십 년 끝에 내가 만민 중에 흩은 애굽 사람을 다시 모아 내되 애굽의 사로잡힌 자들을 돌이켜 바드로스 땅 곧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 그들이 거기에서 미약한 나라가 되되 나라 가운데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나라들 위에 스스로 높이지 못하리니 내가 그들을 감하여 다시는 나라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임이라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지가 되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돌이켜 그들을 바라보지 아니하므로 그 죄악이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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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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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한 주간도 예배자로 살아오셨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펴는 본문은 에스겔서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에스겔서는 청년들이 가장 손이 안 가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낯선 나라 이름이 쏟아지고, 무섭고 이상한 환상이 나오고, 오늘 본문처럼 "악어"니 "갈고리"니 하는 그림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절 읽다가 덮어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은, 배경만 한번 정리하고 나면 여러분의 삶을 정확히 겨냥하는 아주 분명한 한마디를 던집니다. 그 한마디를 붙잡고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계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기대어 삽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실력에 기대고, 어떤 사람은 통장 잔고에 기대고, 어떤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기댑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기댄 그것이 정말 나를 끝까지 받쳐 줄 수 있느냐입니다.
청년의 때는 특별히 무언가에 기대고 싶은 시기입니다. 앞은 안 보이고, 자리는 아직 없고, 마음은 불안합니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무엇이라도 붙잡고 "이것만 있으면 괜찮을 거야" 하고 마음을 놓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 인생을 걸고 붙잡은 것이, 정작 가장 힘든 순간에 내 손안에서 부러진 경험, 혹시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배경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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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면 에스겔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에스겔은 원래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던 시대에 나라에 큰일이 벌어집니다. 신흥 강대국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했고, 에스겔은 왕과 지도자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 끌려가 앉아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이, 성전도 없는 이방 땅 포로 신세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좌절의 자리에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고, 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에스겔이 "애굽"을 향해 선포하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주어진 때가 중요합니다. 바벨론의 세력이 점점 조여 와서 예루살렘이 큰 위기에 몰려 있던 무렵입니다. 바로 그때, 위기에 몰린 하나님의 백성이 마지막으로 손을 뻗고 싶어 하던 그 대상, 애굽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왜 애굽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은 오랜 세월, 위급할 때마다 손을 내밀던 대상이었습니다.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위협 앞에서 유다는 겁이 났고, 그때마다 "애굽에 도움을 청하면 살 수 있을 것"이라며 애굽의 힘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눈에 보이는 강대국 애굽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애굽은 유다를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본문 6절과 7절이 그 실상을 아주 정확한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이 말씀이 오늘 설교의 열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이것입니다. **부러지는 갈대를 의지하지 말고,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이 한 가지를 세 걸음으로 함께 올라가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 강은 내 것"이라는 교만을 꺾으십니다. 둘째, 우리가 붙든 것은 부러지며 도리어 우리를 찌르는 갈대일 수 있습니다. 셋째, 참으로 의지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첫째, "이 강은 내 것이라" — 교만을 꺾으시는 하나님 (3,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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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나님이 애굽의 바로 왕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하나님은 바로 왕을 나일 강 한복판에 늘어져 누운 거대한 악어에 비유하십니다. 나일 강의 악어는 아무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무서운 짐승입니다. 강을 제 몸으로 차지하고 누워, 누구도 자기를 건드리지 못한다고 여기는 존재입니다. 바로 왕이 딱 그러했습니다. 애굽이라는 나라는 나일 강 하나로 먹고사는 나라였습니다. 사막 한가운데를 가르며 흐르는 그 강이 물을 대 주고, 곡식을 키우고, 나라를 먹여 살렸습니다. 나일 강이 없으면 애굽은 하루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은 그 강을 두고 뭐라고 말합니까.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강물을 자기가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먹여 살리는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가 소유하고 자기가 창조했다고 우깁니다. 나일 강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인데, 그것을 받아 누리는 자가 도리어 "내가 만들었다"고 주인 행세를 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던 그 악어를, 하나님이 친히 대적하겠다 하십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적이 아닙니다.
이것이 교만의 정체입니다. 교만은 단순히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두고 "이건 내가 만든 내 것"이라고 말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내가 이룬 것이라 착각하는 것, 그것이 교만의 뿌리입니다.
성경에 이와 똑같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그는 화려하게 세워진 바벨론 성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 "내가 건설했다, 내 능력으로, 내 영광을 위하여." 애굽 왕의 "내가 만들었다"와 정확히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그의 입에서 채 떨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를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교만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강에서 끌어내어 들에 던지신다고 하십니다. 여기 그림이 절묘합니다. 애굽은 나일 강에서 갈고리로 물고기를 낚아 올리며 살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큰 악어가, 자기가 낚던 물고기처럼 갈고리에 아가미가 꿰여 강 밖으로 끌려 나옵니다. 자기가 만들었다고 큰소리치던 그 강에서, 아무도 못 건드린다던 그 짐승이 힘없이 끌려 나와 들판에 던져집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 한 자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9절에서 그 이유를 다시 분명히 밝히십니다.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심판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한마디,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춰 봅시다. 우리는 나일 강을 만들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는 은근히 이런 소리가 있습니다. "이 성적은 내가 밤새워 만든 거야. 이 자리는 내가 실력으로 얻은 거야.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가는 거야."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시 100:3). 나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내 재능도, 내 시간도, 내 숨 한 번도 다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만든 내 것"이라 붙잡는 순간, 우리는 나일 강을 자기 것이라 우기던 바로 왕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교만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흔히 겸손이라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교만의 진짜 반대말은 감사입니다. 교만은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고, 감사는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같은 성적표, 같은 재능, 같은 하루를 두고도 어떤 사람은 "내가 이뤘다"며 목이 뻣뻣해지고, 어떤 사람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무릎을 꿇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손에 쥔 그 좋은 것들을, 오늘 하나님 앞에서 "이것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받은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나일 강을 제 것이라 우기다 갈고리에 꿰인 그 교만의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둘째, 부러지며 찌르는 갈대 지팡이 (6-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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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스스로 신이 되려던 애굽의 교만을 이렇게 꺾으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곧바로 시선을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돌립니다. 왜냐하면 그 교만한 애굽을,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 붙잡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를 붙드는 것도, 결국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의 심장으로 들어갑니다. 6절과 7절입니다.
>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애굽을 "갈대 지팡이"라고 부르십니다. 갈대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강가에 자라는 이 풀은 멀리서 보면 곧고 길어서 제법 든든한 지팡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팡이 삼아 몸무게를 실어 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우지끈 꺾입니다. 그냥 부러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러진 그 날카로운 끝이 도리어 잡은 손을 찌르고 들어갑니다. 지팡이는 나를 받쳐 주라고 잡는 것인데, 이것은 받쳐 주기는커녕 부서지면서 나를 다치게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애굽이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위급할 때 기대면 든든할 줄 알았는데, 막상 온 몸무게를 실으니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무너지면서 그들의 어깨를 찢고 허리를 흔들리게 했습니다. 도움을 바랐던 바로 그것 때문에 도리어 더 크게 상한 것입니다.
여기에 무서운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갈대인지 아닌지는,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워 두고 볼 때는 약한 풀이나 단단한 참나무나 똑같이 든든해 보입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내가 온 무게를 실어 보는 그 순간에야 드러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 가장 무거운 짐이 실리는 바로 그때에 가서야 자기가 의지한 것이 한낱 갈대였음을 알게 됩니다. 평소에는 몰랐다가, 정작 넘어지면 안 되는 그 순간에 꺾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위기가 오기 전에, 지금 미리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기대고 있는 이것은, 갈대입니까 반석입니까.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애굽이 꺾인다는 것을 뻔히 겪고도, 이스라엘은 위기가 올 때마다 또 애굽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모습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 31:1). 애굽은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애굽의 군대와 병거와 말은 눈앞에 보였습니다. 사람은 위기 앞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손에 잡히는 것을 쥐고 싶어 합니다. 당장 만져지고 당장 든든해 보이니까요. 그것이 우리 마음의 오래된 습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훗날 앗수르의 한 장군이 예루살렘 성벽 앞에서 유다를 조롱하며 똑같은 말을 합니다.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사 36:6). 원수의 입에서까지 애굽은 "상한 갈대 지팡이"라 불렸습니다. 애굽에 기댄 자마다 손이 찔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에 매달릴 때마다, 이스라엘은 번번이 손을 찔리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시편 기자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 146:3). 아무리 높고 힘 있어 보이는 사람도, 그를 지팡이로 삼으면 결국 갈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 손에도 이런 갈대 지팡이가 하나쯤 쥐어져 있지 않습니까. 든든해 보여서 온 인생을 실었는데,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꺾여 버린 것 말입니다. 어떤 청년에게 그것은 실력이고, 어떤 청년에게는 사람이고, 어떤 청년에게는 돈입니다. 실력에 인생을 실었는데 한 번의 실패 앞에 무너집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기댔는데 그가 등을 돌리자 가슴이 찢어집니다. 돈을 산성으로 삼았는데 그것이 사라지자 인생 전체가 흔들립니다. 부러진 것도 아픈데, 그 날카로운 끝이 나를 찌릅니다. 가장 믿었던 것에게 가장 깊이 상처받는 것, 그것이 바로 갈대 지팡이의 정체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이렇게 헛된 것을 의지하는 문제의 뿌리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내 지팡이, 내 산성으로 삼는 것. 그것이 애굽에 매달리던 이스라엘의 죄였고, 오늘 우리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손에 쥐고 있다가 부서져서 크게 다치기 전에, 미리 "그것은 갈대다, 온 무게를 싣지 말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꾸중이 아니라, 위험한 것을 쥔 자녀를 미리 붙드시려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기대고 있는 그것이 갈대라면, 이번 한 주 그 손의 힘을 조금 풀고 하나님께 여쭤 보십시오. "이것이 정말 제가 온 인생을 실어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그 사랑의 음성으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셋째,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 참 의지가 되시는 하나님 (13-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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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애굽을 미워하셔서, 그저 벌하고 부수시려고입니까. 본문을 끝까지 읽으면 하나님의 진짜 마음이 드러납니다. 이 단락에서 반복되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6절, 9절, 그리고 마지막 16절까지 계속 울립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사실 이 말은 에스겔서 전체에서 수십 번이나 되풀이되는, 이 책의 심장 같은 문장입니다. 심판을 말할 때도, 회복을 말할 때도 언제나 이 한 문장으로 맺습니다. 곧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최종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는 것." 심판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말씀이 이어집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십시오.
> "사십 년 끝에 내가 만민 중에 흩은 애굽 사람을 다시 모아 내되 애굽의 사로잡힌 자들을 돌이켜 바드로스 땅 곧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
하나님은 심판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사십 년 뒤에 흩어진 애굽을 다시 모으신다고 하십니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나라 위에 군림하는 강대국이 아니라, "지극히 미약한 나라"로 다시 세우신다고 하십니다(15절). 왜 미약하게 하십니까. 16절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지가 되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돌이켜 그들을 바라보지 아니하므로"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낮추신 것은, 이스라엘이 다시는 애굽을 바라보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는 그 부러지는 갈대에 손을 뻗지 않도록, 그 갈대를 아예 치워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진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입니다. 자꾸만 잘못된 것을 붙잡으려는 자녀의 손에서, 그 위험한 것을 빼앗으시는 아버지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갈대를 놓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참으로 흔들리지 않는 분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의 두 그림이 하나로 만납니다. 앞에서는 애굽이 "이 강은 내 것"이라며 스스로 신이 되려 했고, 뒤에서는 이스라엘이 그 애굽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는 교만과, 신 아닌 것을 신으로 붙잡는 의지, 이 둘은 겉으로는 반대처럼 보이지만 뿌리는 하나입니다. 둘 다 여호와를 여호와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나 자신이나 다른 무엇을 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의 교만도 꺾으시고, 이스라엘의 헛된 의지도 끊으시며, 오직 한 가지를 향해 우리를 이끄십니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그 자리를, 우리 삶에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흔들리지 않는 분은 누구십니까. 신약은 그분의 이름을 이렇게 밝혀 줍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한 반석을 치게 하셨고 거기서 생수가 터져 나와 온 백성을 살렸습니다. 그 바위를 두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갈대는 부러지지만, 이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살리려고 스스로 맞으셨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바위가 지팡이에 맞아 물을 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맞으시고 찢기셨습니다. 이사야가 이미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우리가 부러지는 지팡이를 잡느라 손이 찔릴 때, 정작 그분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대신 찔리셨습니다. 갈대는 잡은 나를 찌르지만, 이 반석은 나를 살리려 자기가 찔리셨습니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베드로는 그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증언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벧전 2:6).
이것이 갈대와 반석의 차이입니다. 갈대에 기댄 자는 결국 손이 찔리고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붙든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부러지는 지팡이를 잡느라 손이 찢기고 허리가 흔들린 여러분을, 그분이 지금 부르고 계십니다.
결론
929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이제 반주가 잔잔히 흐르는 이 자리에서, 조용히 우리 손을 내려다봅시다. 지금 우리 손에는 무엇이 쥐어져 있습니까.
어떤 분은 지금 "이건 내가 만든 내 것"이라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꽉 쥐고 계실지 모릅니다. 오늘 하나님은 그 손을 나무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참 주인을 알려 주려 하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만든 것이 아니라 받은 것입니다. 받은 것으로 알고 감사할 때, 교만이 예배로 바뀝니다.
또 어떤 분은 지금 부러진 갈대에 손이 찔려 아파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가장 믿었던 것에게 가장 크게 상처받아, 마음의 허리가 흔들리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아픈 손을, 오늘 반석이신 예수님 앞에 펴 보이십시오. 갈대를 놓아야 반석을 잡을 수 있습니다. 놓는 것이 두렵겠지만, 하나님이 그 위태로운 것을 치우시는 것은 언제나 더 좋은 것을 쥐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배는 노래 몇 곡 부르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다시 모셔 드리는 일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 자리, 내가 가장 의지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을 앉으시게 하는 것, 그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주인 자리를 다시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 딱 한 가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무언가를 의지하고 싶어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것은 갈대인가, 반석인가"를 한 번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부러지는 것 대신 부러지지 않으시는 그분께로 마음을 돌이키십시오. 갈대를 의지하면 손이 찔리지만, 반석을 의지하면 그 위에 인생을 세울 수 있습니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진 이 복이,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236자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가 그동안 부러지는 갈대를 붙잡고 살아온 것을 고백합니다. 받은 것을 내 것이라 우기던 교만을 용서하여 주시고, 흔들리는 것을 의지하다 찔린 우리 손을 싸매어 주옵소서. 이제는 흔들리지 않으시는 반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게 하옵소서. 다시는 갈대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예배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결단찬양: 주만 바라볼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