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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도입↔서론 / 본문↔본론 / 마무리↔결론 / 결단↔결단찬양 / 기도↔기도제목
섹션별 본문 (5개)
1. 떠났고, 또 진을 쳤습니다 (10-13절)
1232자
10절과 1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을 떠나 오봇에 진을 쳤고 오봇을 떠나 모압 앞쪽 해 돋는 쪽 광야 이예아바림에 진을 쳤고"
이어서 12절과 13절입니다.
"거기를 떠나 세렛 골짜기에 진을 쳤고 거기를 떠나 아모리인의 영토에서 흘러 나와서 광야에 이른 아르논 강 건너편에 진을 쳤으니"
여러분, 무엇이 눈에 들어오십니까? 같은 두 마디가 계속 반복됩니다. 떠났고, 진을 쳤습니다. 또 떠났고, 또 진을 쳤습니다. 진을 친다는 것은 오늘 하루를 거기서 산다는 뜻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거기 머물지 않고 다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걸음은 이 백성이 스스로 정한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9장은 구름이 머물면 진을 치고 구름이 떠오르면 떠났다고 적습니다. 언제 머물고 언제 떠날지를 정하시는 분이 따로 계셨습니다. 그러니 이 지명 목록은 이 백성의 일정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신 발자국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지난 사십 년 동안 이 백성의 걸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광야를 맴돌았습니다.
그러나 이 목록에는 되돌아온 이름이 하나도 없습니다. 11절은 그 방향을 모압 앞쪽 해 돋는 쪽, 곧 모압 바깥으로 돌아 나아가는 길이라고 적습니다. 13절 끝은 이렇게 적습니다. "아르논은 모압과 아모리 사이에서 모압의 경계가 된 곳이라." 경계입니다. 경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광야가 끝나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12절의 세렛 골짜기 앞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신명기 2장 13절과 14절이 이 자리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삼십팔 년입니다. 가데스 바네아를 떠난 날부터 이 골짜기를 건너기까지 걸린 세월입니다. 그러니 "거기를 떠나 세렛 골짜기에 진을 쳤고"라는 담담한 한 줄이 그 끝이었습니다. 신명기가 세어 준 삼십팔 년이 여기서 끝났습니다. 성경은 그 무게를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고 그냥 지나갑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도 그런 한 줄로 지나갈지 모릅니다. 특별한 일 없이 진 치고, 자고, 또 떠나는 하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한 줄을 다 적어 두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가 아무 표시도 남기지 못한 것 같거든, 잠자리에 드시기 전에 한 줄만 적어 보십시오. 오늘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 진 치게 하셨는가. 그 한 줄들이 모여 하나님이 이끄신 발자국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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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호와의 전쟁기에 일렀으되 (14-15절)
689자
그런데! 여정을 적어 내려가던 성경이 갑자기 멈추고, 시 한 편을 인용합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이러므로 여호와의 전쟁기에 일렀으되 수바의 와헙과 아르논 골짜기와 모든 골짜기의 비탈은 아르 고을을 향하여 기울어지고 모압의 경계에 닿았도다 하였더라"
여호와의 전쟁기. 이 책이 어떤 책이었는지, 누가 썼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이름 하나와 여기 인용된 몇 줄이 전부입니다.
성경은 왜 하필 여기에 이 시를 끌어왔겠습니까? 바로 앞 13절이 경계를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르논이 모압과 아모리 사이의 경계라는 사실을, 인용된 이 옛 노래가 한 번 더 확인해 줍니다. 지금 이 백성은 남의 땅과 남의 땅이 맞닿은 경계선 위에 서 있습니다.
정작 그 전쟁 기록에 인용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화려한 승전보가 아닙니다. 골짜기 이름과, 비탈이 기울어진 방향과, 경계선입니다. 지형입니다. 이 백성이 지금 서 있는 이 골짜기, 이 경계선이 그 옛 기록에 적힌 바로 그 이름들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에 붙은 이름이 여호와의 전쟁기입니다. 그러니 이 걸음은 이들이 자기 힘으로 남의 땅 사이를 비집고 뚫어 낸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지나는 길도 우리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이번 주에 넘어야 할 비탈이 무엇입니까? 혼자 이를 악물기 전에, 먼저 그 길을 이끄시는 분께 아뢰고 나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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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물물아 솟아나라 (16-18절)
1490자
이제 본문의 한복판입니다. 16절입니다.
"거기서 브엘에 이르니 브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하시던 우물이라"
브엘은 히브리어로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우물이 특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사람이 물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먼저 약속하신 우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보십시오. 물을 주시기 전에 먼저 하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백성을 모으라." 흩어진 채로 각자 받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새벽 이 자리에 나와 앉으신 것도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물을 모인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백성이 물 앞에서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어제 우리가 읽은 21장 5절에서 이들은 "물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20장에서도 물이 없다며 모여들었습니다. 이 백성은 늘 물 앞에서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물 앞에서 이번에는 다른 소리가 납니다. 17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이르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노래합니다. 다투는 소리가 아니라 노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놓칠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때에 노래하여"라는 이 표현이 성경에 꼭 한 군데 더 나옵니다. 홍해를 건넌 그 아침입니다. 원망은 그렇게 많았는데, 이 백성이 노래하는 장면은 민수기 서른여섯 장을 통틀어 여기 하나뿐입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달라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노래했다고 적을 뿐입니다.
여러분, 원망하던 그 백성이 여기서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18절은 그 노래의 나머지입니다.
"이 우물은 지휘관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규와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 하였더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판 것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으로 팠는지 보십시오. 규와 지팡이입니다. 규라는 말은 창세기 49장에서 "통치자의 지팡이"로 옮겨진 그 낱말입니다. 삽이 아니라 지도자의 상징을 들고 땅을 팠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팠기 때문에 없던 물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약속하신 분이 계셨고, 땅을 파는 손이 있었습니다.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판 것도 이 백성입니다.
브엘에서 하나님은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한 우물가에서,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브엘의 우물은 그 광야에서 마실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목마름을 들고 나아갈 곳도 그분 앞입니다. 마른 자리를 혼자 견디지 마시고, 오늘 그 자리를 그분께 아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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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613자
사랑하는 여러분, 노래한 다음에도 이 백성은 다시 걷습니다. 19절과 20절입니다.
"맛다나에서 나할리엘에 이르렀고 나할리엘에서 바못에 이르렀고 바못에서 모압 들에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렀더라"
노래가 걸음을 대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걸음은 올라가는 걸음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줄을 보십시오. 광야가 내려다보인다고 했습니다. 한복판을 걷던 백성이 이제 그 광야를 내려다봅니다.
아직 요단을 건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들을 데려오신 분이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아직 건너지 못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삼십팔 년처럼 길게 느껴지는 기다림이 있고, 물이 보이지 않는 마른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광야를 내려다보는 자리까지 이들을 데려오신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걸음을 세시는 분이 계시고, 주시겠다 약속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새벽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시거든, 그 마른 자리를 놓고 한마디만 드리십시오. "주님, 여기에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걸음을 세시고 마른 땅에 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오늘 여러분의 한 걸음마다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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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기도
202자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의 걸음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시니 감사합니다. 홀로 비탈을 넘는 것 같은 날에도 주님께서 앞서 가심을 믿게 하옵소서. 마르고 답답한 자리에서 원망 대신 노래하게 하옵소서. 주시겠다 하신 약속을 붙들고 오늘의 땅을 파는 손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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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