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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20261007-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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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키시는 복 [목사님 검토용]

목사taejin
예배새벽
본문민수기24:10-25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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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별 본문 (8개)

예배순서

87자
찬송가 308장 내 평생 살아온 길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주기도문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찬송가 415장 십자가 그늘 아래

서론

556자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새벽을 여십니까? 내가 바라는 대로 일이 풀려야 마음이 놓일 때가 있습니다. 내 뜻과 다른 말을 들으면 그 말의 옳고 그름보다 먼저 화가 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락이 바로 그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발람의 입에서는 세 번이나 축복이 나왔습니다. 발락은 손뼉을 치며 분노합니다. 자기가 불러들인 사람이 자기가 원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의 중심에는 발락의 분노보다 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사람이 자기 뜻대로 거둘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발락은 발람에게 높은 자리를 약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람의 입에서 나올 하나님의 말씀까지 살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발람은 돌아가기에 앞서 후일에 관한 말을 전합니다. 그 말에는 한 별과 한 규가 나타납니다. 여러 민족의 끝도 차례로 들립니다. 가까운 일만 바라보던 발락 앞에 더 긴 시간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가며 누가 복을 지키시고, 누구의 다스림을 기다려야 하는지 듣겠습니다.

첫째, 사람의 뜻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앞섭니다

1185자
민수기 24장 10절은 발락의 분노를 보여 줍니다.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라고 발락이 말합니다. 발락에게 세 번의 축복은 세 번의 실패였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것은 자기 계획을 거스르는 말이었습니다. 발락은 11절에서 발람을 자기 곳으로 달아나라고 합니다. 높여 주겠다는 약속도 거두어들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발람의 존귀를 막으셨다고 말합니다.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말입니다. 여러분, 발락이 발람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입니까? 높은 자리와 보상입니다. 그렇다면 발락이 줄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복입니다. 사람이 보상을 약속한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뀌겠습니까? 발락은 발람을 불렀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그 차이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복을 말씀하셨기에 발락의 요구가 그 복을 뒤집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발락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여 얻어 낸 복도 아닙니다. 본문은 복의 시작을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두게 합니다. 발람의 대답도 들어 보십시오. 민수기 24장 1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에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발람은 은금으로 가득한 집을 받더라도 말씀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고 밝힙니다. 이 말은 발람이라는 사람을 무조건 본받으라는 초청이 아닙니다. 이 장면에서 분명한 것은 말씀의 주인이 발락도 발람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발락이 원한 저주와 하나님이 주신 복이 맞설 때, 남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발락이 잃은 보상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질 신탁에는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날 규가 등장합니다. 창세기 49장 10절은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라고 들려줍니다. 규는 다스림을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발람의 말에 나올 규를 들을 때, 우리는 눈앞의 보상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다리게 됩니다. 발락은 지금 당장 발람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시는 장래는 발락이 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느 약속이 더 오래 서 있겠습니까? 사람이 손에 쥔 보상입니까, 하나님이 입으로 주신 말씀입니까? 본문은 우리의 눈을 발락의 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립니다.

둘째, 멀리 보이는 별과 규를 바라봅니다

1432자
발람은 이제 자기 백성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발락에게 이스라엘이 후일 그의 백성에게 어떻게 할지를 듣게 합니다. 민수기 24장 14절의 “후일”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 말은 발락이 당장 얻고 싶었던 결과보다 먼 곳을 가리킵니다. 15절과 16절에서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환상을 보는 자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 소개의 무게는 발람의 이름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들을 말이 발락의 주문이나 발람의 계산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민수기 24장 1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발락은 오늘 저주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발람이 보는 것은 가까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이어서 말합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별은 멀리서도 바라보는 빛의 모습으로 들립니다. 규는 앞에서 들은 다스림의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본문은 이 모습을 노래하면서 모압이 그 다스림 앞에 무너질 것을 말합니다. 발락이 저주하려던 이스라엘에게서 주권자가 일어난다는 선언입니다. 여러분, 발락은 누구의 미래를 막고 싶었습니까? 이스라엘의 미래입니다. 그런데 신탁에서 누구의 미래가 드러납니까? 발락이 막으려던 바로 그 백성에게서 나올 다스림입니다. 사람의 시선은 지금 자기 앞에 놓인 힘을 셉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힘이 미치지 못할 때까지 내다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별과 규를 읽을 때 모든 역사적 장면을 하나의 시간표로 서둘러 묶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먼저 들려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장래를 사람의 적대감에 맡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 24장 18절과 19절은 에돔과 세일을 말합니다. 그들도 영원히 버틸 힘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용감히 행동할 것이라는 말이 들립니다. 이 용감함을 이스라엘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 낼 능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먼저 선언되는 것은 야곱에게서 나올 주권자입니다. 행동의 앞에 하나님의 약속이 놓여 있습니다. 은혜가 먼저 들리고, 그 뒤에 걸어갈 길이 열립니다. 마태복음 2장 2절에서 동방에서 온 이들은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찾은 분은 왕으로 나신 이입니다. 우리는 그 장면을 통해 발람의 별과 규를 그리스도께로 이어 읽습니다. 이 연결은 별이 처음 나타난 모든 역사적 대상을 하나로 확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바라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멀리 보인다고 약속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가까이 보이지 않는다고 발락의 뜻이 이긴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길을 여십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선은 가까운 손해와 이익에만 붙들려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왕의 다스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셋째, 견고해 보이는 나라들의 끝을 들으십시오

1461자
발람의 마지막 말은 한 민족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민수기 24장 20절에서 그는 아말렉을 바라봅니다. “아말렉은 민족들의 으뜸이나 그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으뜸이라는 말만 들으면 끝까지 강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탁은 바로 이어서 그 종말을 말합니다. 지금 높아 보이는 자리와 마지막 자리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당장의 위세가 끝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21절에서 발람은 겐 족속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거처는 견고하고 보금자리는 바위에 있습니다. 본문은 그 단단함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정말 안전해 보이는 자리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하지만 22절은 가인이 쇠약해지고 앗수르의 포로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바위 위에 있으면 모든 날을 스스로 지킬 수 있습니까? 견고한 보금자리가 쇠약해질 가능성까지 막아 줍니까? 본문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눈에 튼튼한 것에도 끝이 있습니다. 23절에서 발람은 탄식합니다. “슬프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시리니 그 때에 살 자가 누구이랴” 이 말 앞에서는 다른 민족의 몰락을 구경하듯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신탁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무게를 듣게 합니다. 24절에는 깃딤 해변에서 오는 배들이 등장합니다. 앗수르와 에벨을 괴롭힐 것이라는 말도 들립니다. 그러나 그 배들이 가져오는 힘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도 멸망하리로다”라는 말로 신탁이 이어집니다. 한 강한 세력이 다른 강한 세력을 누른다고 마지막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바뀌는 힘들을 차례로 보여 주며 하나님의 주권을 향하게 합니다. 이 민족들의 이름을 오늘의 어느 집단에 그대로 붙여 심판을 선언할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이름 맞히기가 아니라 견고함을 자랑하는 마음에 대한 경고입니다. 마지막 25절은 짧습니다. 발람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갑니다. 처음에는 발락이 발람을 불러 자기 뜻을 이루려 했습니다. 끝에서는 두 사람이 각자의 길로 흩어집니다. 그들이 헤어져도 이미 들린 하나님의 말씀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발락의 분노도, 발람에게 약속한 존귀도 신탁의 마지막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떠난 자리에 무엇이 남습니까? 누가 오래가는 복과 다스림의 근원이십니까? 본문은 다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바라보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라고 밝히십니다. 발람이 말한 별의 역사적 지시를 이 한 구절만으로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들으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의 힘은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시기에 우리는 흔들리는 힘을 마지막 의지처로 삼지 않습니다. 새벽에 별을 바라본다는 것은 내일의 형편을 다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형편을 다 알지 못해도 그리스도를 향해 눈을 드는 믿음입니다.

결론

305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먼저 주신 복은 발락의 뜻대로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은혜를 붙드는 길은 우리 힘을 자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 앞에 서는 데 있습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한 가지를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 뜻을 앞세우기보다 오늘 들은 말씀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하루의 결과를 다 알지 못해도 이 기도를 품고 걸어가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순종보다 앞서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말씀을 따르는 걸음이 오늘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210자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말씀으로 복을 지키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눈앞의 보상과 견고해 보이는 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뜻이 말씀과 부딪힐 때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게 하옵소서. 멀리 보이는 약속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순종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결단찬송

16자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