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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202607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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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taejin
예배청년부
본문에스겔33:10-20
날짜2026-07-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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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별 본문 (6개)

서론

1289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옆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은 예배자입니다. 버스를 탔는데 한참을 가다가 창밖 풍경이 낯설어질 때가 있습니다. 반대 방향 버스를 탄 것입니다. 그때 할 일은 하나입니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서, 길을 건너,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멀리 왔을수록 내리기가 더 아깝습니다. 그러나 방향이 틀렸다면 더 가는 만큼 목적지에서 더 멀어질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얼마나 왔느냐가 아니라,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느냐입니다. 오늘 본문 에스겔 33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느냐?"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한 번에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먼저 주전 605년 첫 번째 침공 때, 다니엘과 귀족 청년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주전 597년 두 번째 침공 때에는 여호야긴 왕과 왕족들, 기술자들, 제사장 에스겔까지 그 대열에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 강 가, 포로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강가에서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에스겔33장7절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파수꾼은 다가오는 위험을 가장 먼저 보고 나팔을 부는 사람입니다. 에스겔은 여러 해 동안 나팔을 불며, 이대로 가면 예루살렘이 무너진다고 외쳤습니다. 그 경고대로 되었습니다.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전을 불태웠습니다. 백성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본문 바로 뒤 21절을 보십시오. 에스겔33장21절 "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성경은 오늘 본문을 바로 이 장면 앞자리에 두었습니다. 무너짐을 마주한 자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포로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10절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 어찌 능히 살리요." 한때 이 백성은 다르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겔 18:2). 내 고생은 윗세대 탓이라는 속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말이 달라졌습니다. 내 죄를 드디어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하는 순간 절망이 덮쳤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무슨 수로 사느냐."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절망의 자리에 떨어진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를 붙들기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자기 생명을 걸고 살라고 하십니다

831자
에스겔33장11절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10절의 고백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인정한 것은 옳았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내 죄를 들여다보고, 내 힘을 계산해 보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찌 능히 살리요." 이 계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없습니다. 내 죄와 나, 둘만 놓고 계산하면 답은 언제나 절망입니다. 그 계산 위로 11절이 떨어집니다.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사람은 맹세할 때 자기보다 확실한 것을 걸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자기보다 확실한 것이 없어서,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그렇게까지 하시며 확정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가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고 명령이 이어집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두 번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애가 타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한마디를 들어 보십시오. "어찌 죽고자 하느냐." 이것은 재판장의 언어가 아닙니다. 죽음의 방향으로 걸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언어입니다. 청년 여러분, 혹시 마음속으로 그 계산을 하고 계십니까. 끊겠다고 기도해 놓고 이번 주에 또 그 자리로 돌아갔으니까. 아무도 모르는 그 습관이 몇 년째 그대로니까. 나 같은 사람은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계산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빠진 계산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내린 사형 선고를, 하나님은 자기 생명을 걸고 뒤집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지나온 길이 아니라 오늘의 방향을 보십니다

1007자
에스겔33장12절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 두 사람을 나란히 세우십니다. 그런데 양쪽 모두에게 같은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날"입니다. 지나온 세월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날이 생명을 가른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의롭다는 사람이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않습니다. 몇 년째 빠지지 않은 예배, 사람들이 알아주는 봉사, 예전에 뜨거웠던 기억이 오늘의 죄를 덮어 주지 못합니다. 반대로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너는 죽으리라"는 판결까지 받았던 악인이라도, 돌이켜 저당물을 도로 주고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않습니다. 눈여겨보십시오. 돌이킴이 마음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잡아 둔 저당물이 손에서 떠나고, 빼앗은 물건이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돌이킴은 뉘우치는 기분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방향이 바뀌면 손에 든 것이 바뀝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에 항의합니다.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17, 20절). 쌓아 온 의가 왜 인정되지 않느냐, 악하게 살던 자가 왜 하루아침에 사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쌓은 것은 끝까지 계산되기를 바라고, 저 사람의 잘못은 끝까지 남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짧습니다.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의 발끝이 어느 방향을 향해 있는지 보십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적립금처럼 계산하며 삽니다. 쌓은 스펙, 버틴 세월, 다닌 교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나를 살리는 것은 쌓아 온 것이 아니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무너져 온 세월도 여러분을 끝내지 못합니다. 오늘 돌이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1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셋째, 하나님은 돌아오는 길을 이미 예비하셨습니다

829자
그러면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돌이키기만 하면 죄가 어떻게 기억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빚이 그냥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누군가 갚아야 없어집니다. 그 답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예수님 옆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를 보십시오. 그가 지나온 길은 전부 죽음의 방향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몸으로는 15절의 사람처럼 무엇을 돌려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방향을 트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주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강도가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의 죄가 기억되지 않도록, 그 죄를 대신 지고 죽어 가시는 분이 곁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돌이키면 사는 이유도 같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의 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히브리서는 십자가를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히 10:20)이라고 부릅니다. 돌아오는 길은 우리가 뚫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열어 놓으신 길입니다. 그 길에서 하나님은 기다리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는 아직 거리가 먼데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았습니다(눅 15:20). "어찌 죽고자 하느냐"라고 애타게 부르시던 그 마음이, 돌아오는 자식을 향해 달려가는 발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지금까지 잘 걸어왔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이제 돌아오라"고 초청합니다. 지나온 길이 아무리 멀어도, 길이 되시는 예수님보다 먼 곳은 없습니다.

결단

590자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포로들은 물었습니다. "어찌 능히 살리요." 하나님은 맹세로 답하셨습니다. "돌이키라, 그리하면 산다." 오늘 그 질문이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너는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느냐." 이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돌아서야 할 한 가지를 하나님 앞에서 이름 불러 보십시오. 그리고 고백하십시오. "주님, 저의 지나온 길이 아니라 오늘 저의 방향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 저 오늘 여기서 돌아섭니다. 주님이 저의 길이십니다." 이번 한 주, 15절의 사람처럼 손과 발로 한 가지만 옮기십시오. 지워야 할 것이 있다면 지우고, 돌려줘야 할 것이 있다면 돌려주고, 멈춰야 할 것이 있다면 이번 주에 멈추십시오. 방향이 바뀌면 손에 든 것이 바뀝니다. 반대 방향 버스는 멀리 갈수록 내리기가 아깝습니다. 그러나 내리는 그 정류장이 살 길의 시작입니다. 죽음의 방향으로 가던 우리를 차마 보지 못하셔서 자기 생명을 걸고 부르시는 하나님, 그 부르심에 오늘 몸을 돌이키는 우리 청년들이, 본래 범한 모든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은혜를 입고,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길을 걷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208자
1.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살리요"라는 하나님 빠진 계산을 내려놓고, 자기 생명을 걸고 살라 하시는 하나님의 맹세를 붙들게 하소서. 2. 지나온 길이 아니라 오늘의 방향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돌아서야 할 한 가지를 정직하게 이름 부르게 하소서. 3. 이번 주, 손과 발로 방향을 옮기는 실천 한 가지를 순종하게 하소서. 결단 찬양- 어서 돌아오오 (찬송가 527장)